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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후 셋째 주일[20120122]

인생의 분복을 온전히 누리자.(전 5:18-20)


주현절 후 셋째 주일이 밝았습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과 기쁨이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함께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난 월요일 아침에 한정선 교수님의 모친 정옥희 권사님께서 87세로 소천하셨습니다. 우리교회도 2주전부터 정 권사님과 가족들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였는데, 화요일 장례식장에서 한 교수님을 뵈었을 때에 저에게 함께 기도해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해주셨습니다.

영정 앞에는 정 권사님이 생전에 쓰시던 성경책이 유품으로 놓였는데, 수백 독을 하신 성경책이라고 한 교수님이 말씀해 주시며 보여주셨습니다. 정 권사님은 다니시던 교회에서 한 해 160명 이상을 전도하여 전도상을 받은 적이 있고, 75세 때에는 성경암송 은상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주셨습니다.

유족들의 모습이 모두 평안하였습니다. 죽음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운명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근본으로 되돌아간다는 우주의 원리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되새기게 해 줄 때 한 사람의 죽음은 유족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행복이라는 마지막 선물을 놓고 간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로마서 11장 36절의 말씀을 기억해봅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특별히 ‘인생을 사는 지혜’라는 화두로써 성경 가운데 잠언과 욥기 그리고 전도서를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각각의 교훈이 미묘한 차이를 느끼게 합니다.

잠언은 젊은이들에게 주는 지혜의 말씀입니다. 하나님 경외의 삶이 곧 인생의 지혜로 이 원리대로 사는 법도를 강조합니다. 반면 욥기는 장년기에게 주는 인생의 지혜로 우리의 삶이 원리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에 대해 욥기는 원리대로 되지 않더라도 끝까지 인내하며 견디는 삶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잠언은 인생에는 원리가 있으니 그 원리대로 살아야 된다고 하고, 욥기는 인생이 원리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하니, 그러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전도서가 그 해답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전도서는 우리에게 노년기 인생의 지혜를 교훈합니다.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전도서의 시작하는 구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전도서 1장 1절 이하입니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 1:1-3)

지금 이 말씀을 기록한 사람은 솔로몬 왕입니다. 솔로몬 때의 영토는 아버지 다윗 왕 때보다도 컸습니다. 그는 누릴 수 있는 모든 부귀영화를 다 누려보았습니다. 그런 그가 인생 말년에 하는 고백이 인생을 살아보니 다 헛되다는 것입니다. 1장 2절에서 헛되다는 말을 다섯 번이나 반복할 정도로 인생의 결국이 허무라고 되뇝니다.

그런데 우리가 전도서의 처음만 보고 전도서가 인생을 비관적으로 보고 있다고 판단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것은 사실 전도서의 역설입니다. 전도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인생이 결국 헛되기 때문에 세상 것들에 욕심 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의 마지막에 가면 젊은 날에 인생의 소중함을 깨닫고, 인생을 허랑방탕 자기 마음대로 살 것이 아니라는 교훈을 전해줍니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전 11:9)

전도자는 젊은 시절에 젊은이의 패기로 자신의 꿈을 이루라고 권면합니다. 다만 “청년의 때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전 12:1), 세상 정욕에 빠지는 일(요일 2:16)에 경계하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어 나가라는 것입니다.(엡 5:17)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의 반대를 땅에 속한 썩을 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 3:5)

그래서 전도서의 결말은 전도서 12장 13절에서 너희가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하는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다.” 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전도서 5장의 오늘의 본문을 상고하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8절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보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그것이 그의 몫이로다.”

전도자는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인생의 몫을 주셨다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여기서 ‘낙을 보는 것’을 개역한글성경에서는 ‘낙을 누리는 것’이라고 표현했고, ‘그의 몫’을 ‘그의 분복(分福)’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런 표현들이 좀 더 쉽게 의미 전달이 되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각자에게 준 분복을 ‘누린다’라는 것에 있습니다.

‘누린다’라는 말은 성실과 정직한 삶으로 말미암아 얻는 마음의 평안과 기쁨입니다. 아무리 재물이 많아도 그 안에 성실과 정직이 없다면 그는 재물이 쌓일수록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재물로 인해 근심과 불행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앞에 그런 말씀들이 있습니다. 5장 13절에 “내가 해 아래에서 큰 폐단 되는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가 되도록 소유하는 것이라.” 그리고 계속해서 17절에서 “일평생을 어두운 데에서 먹으며 많은 근심과 질병과 분노가 그에게 있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분복을 누리지 못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누가복음 12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어리석은 한 부자의 비유를 하십니다. 이 부자는 밭의 소출이 너무 많아 이것을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자기만의 미래의 안녕을 위해서 더 큰 창고를 지을 계획을 세웁니다. 그날 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의 결론은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지 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탐심은 분복도 누리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는 기회도 놓치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는 방법이 무엇인지는 분명해 집니다. 나에게 준 복을 다시 나누는 것입니다.

전도서에서 계속 반복되는 말씀이 “해 아래에서”입니다. 전도서는 역설의 책입니다. 즉 우리 인생이 해 아래 있는 허무이고, 유한한 인생이기 때문에 '해 위에 있는 삶'을 생각하며 살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전도자가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말씀이 전하는 본래의 의미인 것입니다.(전 12:1) 계속해서 전도서 12장 7절에서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땅에 살지만 하늘을 보는 인생이 행복한 인생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골 3:1)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2) 그리스도의 영으로 거듭났으면 하늘의 속한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본문 19절에서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그에게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제 몫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였습니다. 우리 인생이 근본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하나님이 맡기신 분복이 있고 이것을 잘 맡아 사용하길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를 하십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15절을 잘 이해하는 데에서 풀립니다.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여기서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를 나누어 준 기준이 무엇입니까? “각각 그 재능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생을 고유하게 창조하셨고, 각각 그 재능에 따라 몫을 달리주신 것입니다. 본문과 관련하여 너무나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더 사랑해서 더 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재능에 따라서 달란트를 맡긴 것입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죄는 무엇입니까? 자신이 받은 달란트를 사용하지도 않고 땅속에 묻어버린 죄입니다. 주인은 이 종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꾸중했습니다.(마 25:26) 결국 주인에게 무익하다는 평가를 받은 종은 지옥에 던져지고 맙니다.(마 25:30)

이 세상에는 한 달란트 받은 종처럼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보니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보다 가진 것이 많고 형편이 낫다고 비교하며 삽니다. 그래서 출발 자체가 불공평하니 내 미래도 두렵다는 것입니다. ‘기분 나빠서 일 안하겠다. 기분 나빠서 공부 안하겠다.’ 하는 사람들이 바로 한 달란트 받은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사람입니다. 결국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두려움으로 자신의 모든 자신감조차 상실해 버리고 맙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재능을 써보지도 못하고 땅에 묻어버린 채 나중에 변명만 늘어놓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가르쳐주신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와 한 달란트 받은 사람 이야기는 오늘 전도서 본문을 이해하는 열쇠와 같은 말씀입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자신에게 불어난 재산이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이 잘해서 얻은 축복이라고 착각하였습니다.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하신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몰랐습니다.(눅 12:48) 이 사람은 결국 탐심의 죄로 하나님을 떠나고 재물로 근심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한편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부여한 고유의 가치를 훼손하고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자기마음대로 왜곡하여 생각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지 못하며 게으르게도 자신에게 주어진 한 인생을 무익하게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전도서 기자는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들에게 “정해진 몫을 받게 하시며, 수고함으로써 즐거워하게” 하셨다.(새번역) 이것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전 5:19)

하나님이 주신 분복을 누리는 인생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그렇지 못한 무익한 인생이 되겠습니까? 창세기 4장과 5장은 가인의 자손과 셋의 자손이 대조되어 나옵니다. 하나님을 떠난 가인의 자손은 자기 이름으로 성을 쌓고, 자기 힘을 믿고 살았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반면 창세기 5장의 셋의 자손의 족보를 보면 몇 살에 누구를 낳고 몇 년을 살다가 죽었다는 말이 반복됩니다. 개역한글성경은 보면 그 대조가 더욱 뚜렷이 나타납니다.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셋은 ... 구백십이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 에녹은 ... 삼백육십오 세를 향수하였더라. 므두셀라는 ... 구백육십구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 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노아를 낳고 ... 칠백칠십칠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창 5:4-31)

이것이 축복 받은 인생과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차이를 족보 형식으로 기록한 성경의 언어입니다. ‘향수(享壽)하고 죽었더라’ 곧 하나님이 주신 생을 다 누리고 죽는 것이 복된 인생입니다.

죽음을 고뇌한다고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 20절이 그런 말씀입니다. 오히려 삶은 고뇌라기보다는 주어진 것을 기쁘게 즐기는 것입니다. 남의 것과 우열을 비교하기보다, 그 때 그 때 주님이 주신 기쁨을 찾아 즐기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오늘일은 오늘로 족하니, 내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전도서의 의미를 함축적으로 해석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마 6:34)

저는 여러분이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의 분복을 온전히 누리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게 어떠한 몫이 주어지고, 내게 어떠한 시험이 오고, 내게 어떠한 환경이 둘러선다 하더라도 하나님만을 경외하길 원합니다. “덧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도 말고”(딤전 6:17)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준 소명을 작은 일상 속에서 "성실과 정직으로"(잠 11:3) 응답해 나가길 바랍니다. 주어진 분복에 감사하고, 내 땀으로 하루하루를 살 때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을 누리는 즐거운 인생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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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후 둘째 주일[20120115]

하늘 문이 열리는 축복(요 1:43-51)


주현절 후 둘째 주일 아침입니다. 기쁨의 동산에 모인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영생의 말씀(요 6:68)이 목마르고 지치고 연약한 우리 심령에 하늘의 위로와 평강과 소망이 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이 시간 “하늘 문이 열리는 축복”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증거할 때에 살아계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은혜(마 16:16, 마 27:54, 요 1:49, 요 11:27, 요 20:28)를 경험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빌립을 제자로 부르시고, 빌립의 소개로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나는 사건입니다. 요한복음은 저자 요한이 한 단어 또는 한 문장마다 새겨놓은 심오한 뜻을 깨달을 때면 우리 안에서 감탄사가 저절로 나오는 영적인 복음서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예수님과 나다나엘의 만남이 중심을 이루면서 둘과의 대화 가운데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영적인 메시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4세기 '닛사의 그레고리'라는 교부는 「모세의 생애」에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가파른 산을 오르는 것과 같아서 많은 사람들이 그 산 밑에도 이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사실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온전히 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소문으로만 듣거나 아니면 인사만 나눈 정도라고 한다면, 그럴 때 내가 그 사람을 잘 안다고 누구에게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안다 할 수 있는 것은 만나서 마음의 대화를 나누고 그의 삶을 눈으로 볼 때 본래 모습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내가 누구를 진정으로 안다고 할 때 그것은 둘 사이의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지고서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요한복음과 다른 복음서들과의 차이점를 잠시 생각하고 넘어갔으면 좋겠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그리고 요한이 전하는 복음서들 모두 예수의 가르침과 제자가 되는 길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초대하시는 제자의 길이 곧 하나님을 만나는 신비의 세계가 된다는 사실을 표현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만남이라는 사건 자체를 극적으로 부각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들에서는 예수님이 부르시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서야 예수를 메시야로 인식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를 만나는 사람들 모두 처음 예수를 보지만 곧 그가 메시야라고 인식하게 됩니다.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믿음의 세계 곧 예수를 믿고 그의 제자가 된다는 의미는 예수를 보는 것이요 예수를 만나는 사건과 동일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선포합니다.(요 1:29) 또한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 베풀 때에 자신의 입으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사람들에게 증언합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의 제자가 된 안드레는(요 1:40) 형제 시몬에게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고백합니다.(요 1:41)

이렇게 요한복음은 참 빛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소개하는 것으로 1장을 시작하면서, 그 예수님과 세례 요한, 안드레, 시몬 베드로, 그리고 빌립과 나다나엘까지의 일련의 만남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하는 신앙 고백이 공통적으로 다 예수가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 자신이 만난 예수를 소개할 때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만났다”(요 1:45)라고 말합니다.

나다나엘은 빌립과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그의 말로 전해 듣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나다나엘이 빌립의 말을 불신한다고 해서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쉽게 단정 짓지는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이후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잘 알 수 있지만 나다나엘은 “그 속에 간사함이 없는”(요 1:47) 사람이었고, 그는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던”(요 1:48) 사람이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먼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다”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싯다르타가 보리수 아래에서 명상하다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장면을 연상하시면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되리라 생각합니다.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다는 표현은 일종의 관용구로써 그가 모세의 율법과 선지서를 마음에 새기며, 이스라엘의 메시야를 기다리는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나다나엘은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세오경과 선지서를 통해 하나님이 약속하신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신명기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라”는 모세의 예언이 있습니다.(신 18:15) 미가는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미 5:2)라고 예언하였습니다.

나다나엘은 이스라엘에 메시야가 오시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결코 믿음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는 약속을 기다렸고, 다윗의 시편대로 “예루살렘에 평화가 깃들도록”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시 122:6)
 
그런 나다나엘에게 빌립이 전한 소식이 바로 "우리가 기다렸던 메시야가 나사렛으로부터 오셨고 내가 직접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다나엘은 메시야가 어찌 유대 땅이 아닌 이방의 갈릴리에서 나올 수 있는지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 갈릴리는 사마리아 북쪽의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한 땅입니다. 이 땅은 이방인과의 혼혈로 신앙이나 문화에 있어 순수성을 잃은 전통적인 유대와는 많은 차이가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더구나 나다나엘은 선지서를 통해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나신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갈릴리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느냐”는 의구심은 아주 당연한 것입니다.

이때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하는 말이 그렇다면 “와서 보라” 하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빌립은 자신의 말로 판단하지 말고 와서 직접 만나보면 메시야인지 아닌지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46절과 47절의 행간을 읽기는 쉽지 않습니다. 빌립과 나다나엘이 친분이 있는 사이라고는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건데 나다나엘이 빌립이 소개하는 예수를 일단 만나기나 해보자는 편안한 마음으로 나선 것인지 아니면 빌립이 강권하여 어쩔 수 없이 따라간 것인지를 알기는 어렵습니다.

어떤 상황이었건 빌립이 나다나엘과 동행했을 가능성은 많습니다. 분명한건 예수님의 제자가 된 빌립은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나도록 인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빌립 역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표상이어야 합니다. 예수를 만날 수 있도록 돕는 역할, 한 사람을 죄의 길에서 돌이키고, 구원으로 인도하는 일은 분명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입니다.

5만번 이상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는 조지 뮬러도 한 친구의 회심을 위해 기도했지만 오랜 동안 응답이 없다가 그 기도가 63년 8개월만에 이루어졌다는 일화는 유명하지요. 예수를 만난 사람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이어야 하는 것입니다.(약 5:20)

오늘 본문의 나다나엘과 예수와의 만남은 요한복음 1장에 등장하는 예수와 다섯 사람과의 만남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만난 뒤 예수가 누구신지를 고백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고 의심했던 나다나엘도(요 1:46)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나서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왕입니다.”라는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요 1:49)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빌립과 예수와의 대화는 특별하게 언급하지 않는 저자 요한이 나다나엘과 예수의 만남의 사건에서는 마치 참았던 말보따리를 풀어놓듯이 예수님의 입을 열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본문의 말씀은 문자적으로 예수가 나다나엘에게 하는 말씀 같지만 1장 전체적으로 보면 그동안 침묵하셨던 예수님이 마침내 나다나엘이라는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음을 선포하시는 영적인 장면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이제 나다나엘과 예수의 만남이라는 사건이 과연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나다나엘과 예수와의 만남 속에 있는 복음의 신비를 찾는 열쇠는 예수님의 두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보고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는 말씀이고(요 1:47), 또 하나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는 말씀입니다.(요 1:51)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신 선포는 그가 혈통적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사실을 새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의 말씀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라”는 말씀처럼(롬 2:28),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평강과 예루살렘의 회복을 소망하는 정직한 자가 진짜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선포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 옛날 야곱은 태생 술수부리는 자로 태어나서 속이는 일, 간사한 일을 하며 살았습니다.(창 27:35) 예수님의 선포는 참 이스라엘로 불리는 나다나엘과 첫 이스라엘이었던 야곱과의 대조를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시대에도 나다나엘처럼 정직하고 의로운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런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이 하시는 약속은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그에게 하늘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궁극 인간이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없고, 인간의 힘으로 하늘의 문을 열 수 없는 법, 그런데 예수를 만나면 하늘이 열리는 축복이 있다니 이 얼마나 흥분된 일입니까?

하늘 문이 열려있는 곳 그곳이 이 땅의 벧엘입니다.(창 28:19) 과연 우리의 삶에는 하늘 문이 열려습니까? 내 가정은 하늘 문이 열린 가정입니까? 우리 교회는 하늘 문이 열린 교회입니까? 하늘 문이 열려있는 그 곳이 하나님의 장막,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입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나는 사건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늘 문이 열린다는 진리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만이 하늘 문을 여실 수 있습니다.(계 3:7) 하늘 문이 열리지 않으면 그 누구도 하나님을 만날 수도 볼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이 얼마나 큰 기쁨입니까? 예수님을 통해 잃어버렸던 에덴에서의 하나님과의 동거가 회복되고, 예수님을 통해 야곱에게 약속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약속이 성취됩니다. 저는 여러분이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하늘 문이 열리는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하늘 문이 열리는 복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 이 선물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나다나엘이라는 이름의 뜻이 바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의미입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경험하고 비로소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자신의 이름값을 하게 됩니다. 아무리 이름을 거창하게 지어도 그 이름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난 나다나엘. 그때 나다나엘은 이름대로 하늘 문이 열리는 하나님의 선물을 약속받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하는 이 시대의 나다나엘이 되길 소원합니다. 우리가 나다나엘처럼 정직하게 행하고(시 15:2), 한결같이 예수님만 바라본다면(히 12:2), 영적 계시의 세계가 열리고(엡 1:17), 이 땅에 살지만 하늘과 연결된 사람이 됩니다.(창 5:24) 우리 인생이 나다나엘에게 약속하신 것처럼 하늘 문이 열리는 축복이 있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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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웨슬리티스토리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