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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열심
    교회력에 따른 본문 중심 설교 2014. 3. 16. 16:55

    사순절 둘째 주일(2014년 3월 16일)

    요한복음 2장 13-22절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열심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은 그들의 명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유월절이 다가오자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막11:15). 그런데 예수님은 이방인의 뜰에 들어서자 기막힌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는 제사드릴 제물을 팔고 있었고, 성전세로 드릴 세겔을 바꿔주는 환전상도 있었던 것입니다(출30:13).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꾼과 환전상을 내쫓은 사건은 시대적 부패상에서 나온 참된 신앙의 표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열심으로 일하셨습니다. 이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돌이켜 보게 합니다. 이 시간 예수님의 모습에서 구원의 길을 발견하며 함께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가. 교회의 주인이 사람이 되면 타락합니다(13-14절).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13-14절).

     

    본문은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워졌다’는 표현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기 전 날에 어린 양을 잡아 구워 먹고, 그 피는 문설주에 발라 애굽 땅에 내렸던 재앙을 피한 날입니다. 하나님은 이 날을 ‘여호와의 절기’로 기념하며 영원한 규례로 지킬 것을 명하셨습니다(출12:14). 요한은 ‘여호와의 절기’를 ‘사람들의 절기’로 변질시킨 유대인들의 타락을 의도적으로 꼬집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의식 속에는 더 이상 하나님의 절기라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신앙생활이 형식화 되고, 대중화 되면서 유월절의 전통은 남아 있지만 더 이상 자신의 죄를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는 축제가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중심이 된 연례행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성전도 더 이상 하나님의 전이 아닌 권력층이 장악한 사람의 전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종교가 사람의 종교로 바뀐 결과입니다.

     

    종교의 타락은 대부분 제사장의 타락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하나님을 아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에 욕심을 부렸습니다(삼상2장).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교회의 부패는 목회자의 타락과 교회를 이권의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에게서 비롯됩니다. 신앙생활이 형식화 되고 교회의 주인이 사람이 되면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종교 행사만 벌이게 됩니다(사1:13).

     

    나. 하나님의 집이 장사하는 집이 되었습니다(15-16절).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15-16절).

     

    예수님은 이방인의 뜰에서 매매되는 소와 양을 모두 성전 밖으로 몰아내고, 환전하던 돈도 쏟아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16절). 본문에서 예수님은 성전을 가리켜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누구의 소유 차원에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신앙생활의 핵심을 지적하고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맺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 아버지의 집이란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특별한 관계도 되지만 성전에 나오는 자는 하나님과의 언약적 사랑의 관계를 형성해야 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였을 때 “나는 네가 건축한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내 이름을 영원히 그 곳에 두며 내 눈길과 내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을 것이다”고 하셨습니다(왕상9:3).

     

    성전은 하나님의 마음이 계신 곳입니다. 물론 솔로몬의 성전은 무너지고 예수님 당시는 헤롯이 지은 성전이었지만 이 땅에 세워진 성전의 의미는 동일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성전을 일컬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였습니다(사56:7).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 곧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마땅합니다(출25:22).

     

    그러나 신앙생활이 형식화 되고, 대중화 되면서 성전에 모이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는 관심이 없고 신앙을 명목으로 이득을 챙기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의 상당수 인구가 성전에 생계를 걸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대변해 줍니다(Jeremias). 로마와의 권력 구조 속에 기득권을 누리는 소수 권력층이 있었고, 예루살렘은 성전 중심의 경제 체제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사라진 교회는 건물이 아무리 화려해도 얼마든지 시장터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교가 사람의 종교가 되면 하나님, 교회, 예배라는 용어를 아무리 붙여도 그 안에서는 사람이 주인공이 되고, 사람이 칭찬 받는 체계가 만들어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보상관계로 변하고, 사람들과는 비즈니스 관계로 연결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떠나서는 참된 신앙생활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다.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17-19절).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17-19절).

     

    복음서 저자 중 가장 후대에 기록한 요한은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을 회상하며 꼭 강조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복음서에는 없고 요한복음에만 언급하는 부분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 채찍을 든 사건에서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는 시편 말씀을 떠올렸습니다(시69:9).

     

    예수님께서 채찍으로 소와 양을 내몰고 돈을 쏟고 상을 엎었다고, 성전의 기능이 정화되고 많은 사람들이 회개했을까요? 분명 하루도 못되어 헤롯 성전의 이방인 뜰에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 장사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일회성의 에피소드였지만 제자들은 그 의미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경험한 후 깨달았던 것입니다.

     

    본문에서 ‘주의 전’은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가 흘러나오는 거룩한 집을 말하는데, 곧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즉 요한은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을 하나님을 향한 끓어오르는 사랑,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뜨거운 열의로 보았던 것입니다. 이천년 전 이 사건은 한번으로 끝났을지 모르지만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열심을 읽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나를 깨뜨려서라도 하나님의 의를 세우려는 타오르는 열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순절기를 보내며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이 열심으로 십자가까지도 지실 수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열심은 하나님의 의를 위해 자신을 깨뜨린 희생이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몸까지 드린 순종이었습니다(빌2:8).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생활의 열심은 바로 이런 열심입니다. 나를 높이고 자기 이름을 나타내려는 열정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해 나를 삼키는 열심이 이 시대에 하나님을 위한 진정한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있습니다.

     

    라. 십자가를 따르면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20-22절).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20-22절).

     

    우리는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제자들조차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요한은 “사흘만에 성전을 다시 세우겠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그분의 육체적 부활을 가리킨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예수님의 열심에서 참된 신앙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곧 믿는 일과 따르는 일은 하나라는 것입니다(엡4:13).

     

    믿는 일은 쉬울 수 있지만 따르는 일에는 반드시 대가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막8:34).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데에는 내 뜻을 하나님 뜻에 복종시키는 자기 부인과 자기에게 맡겨진 십자가 사명이라는 큰 희생이 필요합니다. 사명의 길에는 필연 대가가 있지만 예수님은 고난 뒤에 오는 영광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막9:2). 고난 뒤에는 영광이 있고, 십자가 뒤에는 부활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의 몸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다시 세우시는 결과를 낳으셨습니다(고전3:16). 요한은 예수님의 생명이 들어감으로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듯이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 안에 일어나면 시장바닥 같은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거하시는 성전으로 변화된다는 놀라운 진리를 우리에게 선포하고 있습니다(Grün).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참된 성전이 나타난 것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하나님이 거하는 성전이 되고, 십자가를 따르는 성도에게는 부활의 영광이 주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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