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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자녀를 주신 하나님의 뜻
    교회력에 따른 본문 중심 설교 2011. 3. 3. 15:22

    주현절 후 제8주일[20110227]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자녀를 주신

    하나님의 뜻(창 22:1-14)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인물들은 오늘날 우리 인생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신앙의 모델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인생의 깊은 역경을 생의 의미로 승화시키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신앙의 인물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아브라함을 들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시는 유명한 사건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창세기 22장의 이 사건을 보며, 약속의 씨로 주신 이삭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었나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본문의 사건으로부터 십년 전쯤 일어난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나이 백세 때에 ‘웃음’이라는 뜻의 아들 이삭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한지 25년만의 약속 성취입니다. 그런데 이 ‘웃음’은 ‘하나님이 웃으셨다’가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을 비웃었다’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아브라함은 약속하신 아들을 기다리지 못하고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이미 얻었지만, 하나님은 자신이 “말씀하신대로” 사라를 통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십니다(창 21:1). 그런데 이삭이 자라면서 문제가 하나 생깁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스마엘이나 이삭이나 귀한 아들이지만 이스마엘이 배 다른 이삭을 자주 놀리는 것입니다.

     

    사라가 보다 못해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으라고 애원했는데, 아브라함은 이스마엘도 자기 아들이기 때문에 이 일로 매우 근심하게 됩니다(창 21:11).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길 그 일로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창 21:12). 하나님이 사라 편을 드시는 것을 아브라함은 참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연약한 여인과 아이를 집에서 쫓아내 광야로 내모는 일, 그것은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정말 못할 일이었습니다. 죽으라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먹을 것 얼마와 물 한 가죽부대로 얼마를 버틸지, 이스마엘도 내 자식인데.” 이런 생각이 아브라함의 마음을 짓누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것이 말 못할 상처로 남았을 것입니다.

     

    창세기 22장은 이로부터 십년 정도 지난 때의 사건입니다. 그 사이 십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성경은 침묵합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이스마엘이 있었지만 이삭의 재롱과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서서히 그 아픔도 잊혀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기록이 없으니 아마 아브라함도 잠시 하나님을 잊고 살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창세기 22장 1절과 2절은 그 동안 침묵하셨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갑자기 나타나셔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에게 이것은 날벼락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잊혀질만한 이스마엘에 대한 기억이 다시 살아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이스마엘도 죽음으로 내몰게 하셨으면서, 이제 십년 동안 애지중지 키운 이삭도 아예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시니 떨리고 참담한 순간을 맞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3절 이후 6절까지 삼일의 기간이 흐르는 동안 아무런 대화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직 행동만 있을 뿐입니다.

     

    본문을 대하는 우리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왜 하나님은 약속한 씨 이삭을 죽이라고 하셨을까? 그러려면 아예 아들을 주지 말 것을. 하나님은 단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고자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을까요?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한 번 생각해 봅니다.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부지런히 떠날 채비를 합니다. 두 종과 이삭을 데리고, 번제 나무를 준비하여 브엘세바에서 모리아까지 약 70km의 여행을 시작합니다. 삼일 길, 아브라함은 무슨 생각을 하며 걸었을 지도 궁금합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했다고 알고 있고, 하나님이 정말 아들을 죽이는 지 끝까지 지켜보다가 마지막 순간 천사를 통해 극적으로 멈추게 하셨다는 스토리를 익히 우리 머릿속에 그려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입장에서 과연 삼일 동안 그런 상상을 했을까요?

     

    아마도 그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십년 전 이스마엘도 데려가시더니, 결국 이삭도 데려가시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며 걸었을 것입니다. 그때에 아브라함의 믿음이라면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이었지, 이삭을 죽여도 하나님이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그런 믿음은 아닐 것입니다.

     

    삼일 길, 아브라함은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스마엘을 광야로 보낸 후 이삭과 살았던 십여년의 삶을 되돌아보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나이 75세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길을 떠나 도착하는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창 12:8). 불현 듯 아브라함의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이삭을 얻고부터 잃어버린 예배입니다.

     

    본문 4절, 5절입니다.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그 동안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뜻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한 씨로 부르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약속의 씨 이삭조차도 하나님의 구원과 상관없을 때에는 데려가신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아들, 사랑하는 자, 독자 이삭을 통해서 아브라함이 서있어야 할 예배의 자리로 다시 불러놓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정을 주시고, 자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가정과 자녀의 복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이을 씨앗으로 주신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녀는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입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를 하나님의 구원과는 상관없이 부모가 원하는 희망으로 키우고 있습니다. 자녀는 부모 곁에서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고 자라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도구로 성장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가정을 주시고, 자녀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아브라함의 머릿속에는 이삭을 살릴 생각이 추호도 없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어떻게 죽일까를 고민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때 그 동안 말이 없던 아들이 갑자기 질문합니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이 때 아브라함의 입에서 나온 말은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말이었습니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도살하려는 사건, 이것은 육신의 자식을 죽이는 것이 아닌 내 아들, 내가 사랑하는 자, 독자 이삭에게 목적을 두었던 내 뜻과 내 의지를 죽이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내 뜻이 죽고 하나님의 뜻이 살아나는 바로 그 순간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단단히 결박하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아들을 도살하려는 순간 하나님의 천사가 급히 말립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죽이고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부른 그 땅의 이름, “여호와 이레” 그것은 우리의 구원과 관련하여 하나님이 준비하셨다는 뜻입니다. 부모가 예배자로 살면 자녀는 하나님이 키우십니다. 죽은 줄만 알았던 이스마엘이 후에 아브라함의 임종 때 같이 했고(창 25:9), 이삭도 복 받은 자가 됩니다(창 26:12).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녀를 주신 것은 하나님 나라와 구원을 위한 귀한 선물로 이해해야 합니다. 거기에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자녀를 내 뜻으로 키우려고 하면 구원과는 자꾸 멀어지고 그 자녀에게 품으신 하나님의 계획이 피어나지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사과 속에 씨앗이 몇 개 들었는지는 어린 아이도 셀 수 있습니다. 그러나 씨앗 속에 사과가 몇 개 들었는지는 하나님만 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부모에게 씨앗의 개수를 세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씨앗 속에 담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영적 경지는 그가 올라온 높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헤쳐 나온 깊이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시험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을 통해 우리 가정, 우리 자녀의 구원을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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