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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난 가운데서도 순종해야 합니다.
    교회력에 따른 본문 중심 설교 2015. 3. 29. 05:00

    종려주일(2015년 3월 29일)

    요한복음 12장 12-19절

     

    고난 가운데서도 순종해야 합니다.

     

     

    가. 성도는 진리의 길을 가야합니다.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12-13절).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로 절정을 이루게 되는 사순절 여정의 마지막 한 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은 종려주일로 불리는데 예수님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을 때 백성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던 데서 유래합니다. 이스라엘에서 종려나무는 승리의 상징입니다.

     

    대대적인 환대를 받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는데 그러면 이것이 과연 승리의 행진이었을까요? 백성들은 ‘호산나’하고 외쳤습니다. ‘제발 우리를 해방해 달라’는 요구였습니다. 그들은 로마로부터의 독립을 이룰 수 있는 정치적 메시야로 예수님을 기대했습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에 오르면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에만 관심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심정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은 십자가를 지기 위함이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일찍이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라고 하였습니다(요1:29).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끝까지 진리의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영광의 길을 가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군중의 소리가 커질수록 예수님은 더욱 외로우셨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환호하나 예수님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십자가의 길을 가기 때문에 고독할 수밖에 없으셨을 것입니다. 성도의 길이 이렇습니다. 성도는 진리의 길을 가야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외로울 때도 있습니다. 아무도 그 마음을 몰라줄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주님 가신 진리의 길을 가야 합니다.

     

    나. 표적만 보고 쫓아가서는 안됩니다.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17-19절).

     

    유대인들은 표적을 좋아하고 찾는 성향이 컸습니다(고전1:22). 예수님께서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보고 돈과 상을 엎으셨을 때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이 왜 이런 행동을 하셨는지 관심하기 보다는 이런 일을 했으니 무슨 표적이라도 있느냐고 물을 정도였습니다(요2:18).

     

    본문을 보면 백성들이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부르고 크게 환대하였습니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을 보고 많은 사람이 믿었기 때문입니다. 18절에 “무리가 예수를 맞이하였던 것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을 수도 있습니다(요2:11). 그러나 표적을 보고 믿는 신앙은 어린 아이와 같은 것입니다. 표적은 믿기 위해 주시는 것입니다. 표적을 믿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 아닙니다. 신앙의 기준은 표적이 아니라 완전입니다(마5:48).

     

    오늘 우리 성도들도 이 점을 타산지석 삼아 완전을 목표로 나아가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를 게을리 하면 교회 다니면서도 요행만 바라는 사람이 됩니다. 신앙의 본질과 상관없는 행사만 쫓다가는 결국 망하고만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다. 고난 가운데서도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의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14-15절).

     

    성도는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다고 했습니다. 흰말을 타고 들어가면 멋있어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의도적입니다.

     

    예수님은 스가랴서의 말씀을 이루려 하셨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9:9). 여기서 나귀 새끼를 타는 이유로 겸손을 강조하였습니다.

     

    ‘겸손’(아니)은 ‘고난을 당하다’라는 뜻에서 왔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겸손하셨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스스로 낮아지신 모습입니다(요6:15). 이는 이사야서에서 고난의 종에 대해 이야기 한 것과도 같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7).

     

    나귀 새끼는 예수님을 태우고 천천히 움직였을 것입니다. 마치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연상되는 순간입니다. 진리의 길은 외로울 뿐만 아니라 고난 가운데서도 순종하는 길입니다. 우리도 스스로 비우고 낮아짐으로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라. 고난 뒤에는 영광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16절).

     

    예수님은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마지막까지 순종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우리도 이 길을 가야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처음에는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본문에서 ‘처음’과 ‘영광을 얻으신 후’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고난 뒤에는 영광이 있음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동상이몽을 하며 예수님을 등에 업고 이 땅에서 자신의 영광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고난의 길을 가는 사람을 오히려 바보 취급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증언합니다. 고난의 길이 승리의 길입니다. 고난 뒤에는 영광이 따릅니다. 십자가 뒤에 면류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간 예수를 지극히 높이시고 가장 큰 권세를 주셨던 것처럼 주님의 길을 가는 사람을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높여주십니다(빌2:9-10). 우리는 이 믿음으로 신앙의 경주를 완주해야 합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순종하는 일이 진정한 승리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룬 길에는 반드시 영광의 보상이 있습니다(계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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