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교만의 죄
    교회력에 따른 본문 중심 설교 2008. 12. 9. 00:42

    대강절 둘째주일[20081207]

     

    교만의 죄(창 3:1-8)

     

    대강절 아침 언약의 동산에 나오신 저와 여러분들에게 우리 주님의 놀라우신 은혜가 충만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미국의 어떤 목사님이 주일 예배에서 죄의 심각성에 대해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나오는데 한 교인이 “목사님, 목사님은 죄를 너무 심각하게 다루십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해당되지 않는 죄가 없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듣고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죄라고만 말씀하시지 말고, 왠만하면 실수라고 좀 해주시지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잠시만 기다릴 수 있겠냐고 말하고선 약국에 다녀온 뒤 독극물이라는 라벨이 붙은 병을 하나 들고 왔습니다. 그리고는 그 교인에게 말씀하길 “무슨 말씀이신 줄 알겠습니다만, 여기 있는 독약에 독극물이라는 라벨 대신 먹어도 위험하지 않다는 라벨을 붙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여러분, 죄는 죄입니다. 죄를 죄라고 가르치지 않는 것이 더 위험합니다. 로마서 6:23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죄에 대해 크게 두 가지로 이야기하는데,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 16:9)라는 말씀과 같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그 구원의 은혜를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또한 믿는 사람에게 죄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가 됩니다.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약 4:17) 죄란 결국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하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안하고, 감사돌리지도 않는 것도 죄가 되는 것입니다.(롬 1:21)

     

    오늘의 주제는 일곱가지 치명적인 죄 가운데 교만입니다. 믿는다고 하는 사람조차 대부분은 사실 교만이라는 죄를 쉽게 버리지 못한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평화의 왕, 구원의 주로 이 땅에 오실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강절에 우리 안에 교만의 죄가 남아있다면 깨닫고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길 원합니다.

     

    본문은 첫 인류 아담이 처음으로 죄를 짓는 장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담에게 들어온 것이 교만입니다. 창세기 3:1-5에,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교만은 우리를 쉽게 속이는 특성이 있습니다. 악의 모든 형태는 교만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잠 8:13, “나(여호와)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우리가 교만을 버려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잠언 6:16-19,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

     

    그러면 무엇이 교만인지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말씀드리면,

    1. 교만은 하나님이 없이 자신이 주인으로 사는 삶이 교만입니다(롬 1:28). 자기 중심의 삶, 부와 돈이 인생의 목적인 삶, 자신의 목적으로 사는 삶이 교만입니다.

     

    2. 교만은 하나님이 계심을 알고도 하나님께 영광돌리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는 삶이 교만입니다. 즉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자신이 가로채는 것이 교만입니다. 밥 먹는 것에 감사가 없는 것, 신선한 공기를 주심에 감사가 없는 것이 교만입니다. 기도가 없고, 하나님께 돌려드릴 것이 없거나 아깝다고 생각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인간은 자신을 들어내기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시고 위대하심을 드러내기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교만은 이처럼 인간의 정체성을 잃어버릴 때 비롯됩니다. 교만은 허영을 꿈꾸게 만들고 불순종을 낳게 합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허영을 꿈꾸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불순종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러한 교만은 유전되어 모든 인간 안에 잠재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높일 뿐만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자기 주변의 사람들을 자기보다 낮게 평가하고 살고 있습니다. 둘 다 교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이 타인에게 봉사하는 직업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이러한 교만의 함정에 빠져들기 쉽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자기 의를 들어내는 것이 바로 교만이 가지는 대표적인 특징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교만은 우리 삶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오만, 거만, 자랑, 위선 그리고 악행을 하며 즐거워하는 것 등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안의 교만은 어떻게 제거할 수 있겠습니까? 교만의 치료제가 있다면 그것은 겸손입니다. 겸손하기 쉽지 않다는 것 자체가 교만이 얼마나 인간에게 치명적인 죄로 자리하고 있는 지를 증명하고 있는 셈입니다. 겸손은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육체적 조건의 한계가 있으며, 정서적 요구를 필요로 하고, 죄 짓는 성향을 지닌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의 연약성마저도 아시며 모든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서로가 서로를 판단하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자신이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은 없습니다. 겸손은 인간의 위치를 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겸손은 영적 진보를 이루는 전제가 됩니다. 어거스틴(Augustine)은 “기독교의 교훈을 내게 묻는다면 그것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겸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겸손을 잃어버리고 그리스도인이라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 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사 57:15)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셨습니다. 낮아질 수 있는 가장 낮은 모습으로 낮아지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겸손의 모델을 보여주셨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을 우리가 본받으면 우리는 교만이 사라지고 겸손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기”(엡 2:5)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안의 교만이 사라질 때 겸손하신 주님이 우리 안에 오시고, 주님과 함께 겸손해지게 됩니다. 주님을 본받아 낮아지시고, 겸손해지는 축복이 임하시길 원합니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