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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냥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교회력에 따른 본문 중심 설교 2008. 3. 23.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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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surrection


    부활절[20080323]


    그냥 주님을 사랑하십시오.(요 20:1-18)

     

    1. 사순절의 회고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지낸 40일간의 사순절이 지나고 드디어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였습니다. 만일 사순절의 기간을 온전히 주님과 함께 고난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에겐 부활절을 맞이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한다면, 과연 오늘 이 자리에 나올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생각해봅니다.

     

    저 또한 그러한 자격이 되지 않음을 이번 사순절에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주님께서 돌아가신 시간은 지난 고난주간의 금요일 정오에서 세시 사이입니다. 성경은 이때에 어둠이 계속되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45절에,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되더니.” 인류의 역사상 가장 슬픈 카이로스였습니다.

     

    주님의 영적이고 정신적인 상태의 고통은 잠시 언급을 멈추더라도, 예수님의 육체적 상태는 거의 죽음의 상태에 다다랐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시간은 금요일 아침 9시였기에 세 시간이 넘는 동안 십자가상에서 살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으셨습니다(막 15:25). 등에는 살점이 떨어져나갔고, 머리에는 가시가 박힌 채 계속해서 피가 흘러나왔을 것입니다. 숨을 내뱉기도 힘든 고통 속에 이미 육체적 생존 한계는 지났을 지도 모릅니다.

     

    이천년이 흘러 당시 보다 훨씬 수월하게 믿음 생활을 할 수 있는 우리들이 일 년에 단 한 번 맞게 되는 성금요일의 시간, 우리가 이 날 하루만은 온전히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뜻한 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런데 지난 금요일 정오를 지나며, “아 이 시간 주님이 돌아가셨지”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육체적 배고픔에 허기를 때우려는 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난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금요일 오후 주일 설교를 본격적으로 정리하면서, 사실 일주일 내내 부활절 주일 설교를 준비한다고 했지만, 과연 내가 주님의 고난에 얼마나 동참했는가를 생각하게 되었고, 나는 내가 그렇게 원치 않는 직업적 종교인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문해 보았습니다. 주님의 고난에 온전히 동참하지도 못한 내가 “주일 준비는 무슨 주일 준비냐”는 부끄러움과 안타까움이 내 마음을 억누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내 마음에, 성금요일 오후, 낙심하고, 절망하는 심정으로 한참을 책상 앞에 앉아있는데, 갑자기 제 마음에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에 이런 음성이 들립니다. “내가 다 이루었다. 내가 너를 위해 죽었다.”

     

    이천년 전 천사가 예고한 대로,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마 1:21)로 오신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으로 그의 생을 바치셨으며, 오백년 전 이사야가 예언한 고난의 종으로,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사 43:6)는 말씀을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셨습니다(요 19:30). 그리고 이제 천사의 증언처럼, “예수님은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마 28:6) 할렐루야!

     

    오늘 아침, 우리 주 예수님께서 죽으신 지 사흘 만에 다시 사셨습니다.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고전 15:21)로 부활하셨습니다. 비록 우리의 죄성이 자꾸만 되살아나고, 하나님의 성품을 몸에 담기엔 부족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위해 죽었다. 걱정하지 마라. 나를 믿기만 하라.” 이것이 우리에게 주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의 복음입니다.

     

    부활절 아침, 주님의 부활의 은혜와 기쁨이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사흘 뒤, 곧 우리가 말하는 주일에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신이 안치된 무덤으로 가서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놀랍게도 막달라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그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맨 먼저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줘야만 할 이유가 있었을까요? 저는 오늘 부활하신 주님이 특별히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시어 그녀를 만나준 사건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2. 막달라 마리아는 누구인가?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사역 초기부터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던 사람들은 여인들이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40절을 보면, 이러한 여인들로 막달라 마리아와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 등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 중 막달라 마리아는 누구입니까? “막달라”(Magdalene)라는 지명은 갈릴리 호수에서 조금 벗어난 곳의 작은 어촌입니다. 이 마을 출신 마리아는, 마가복음 16장 9절에 있는 것처럼, 전에 일곱 귀신이 들렸는데,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고, 해방되었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분명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귀신들림에서 치료받았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마가, 마태, 요한복음에서는 부활 기사에서만 이 여인이 언급될 뿐 그 이전에 그녀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복음서 중 유일하게 누가복음 8장 2절에서만 이 여인이 예수님께 치료받았다고 짧게 언급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8장 1에서 3절을 통해 알 수 있는 흥미로운 사실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사역을 도왔던 사람들 중에는 많은 여인들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눅 8:2-3)

     

    이후 예수님께서 로마 병정들의 손에 죽으시던 날, 예수와 함께 했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났지만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은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의 증언에 따르면,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요 19:25)라고 하였고, 열두 제자 중 유일하게 있었던 사람은 “예수가 사랑하시는 제자” 바로 요한 자신이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그 후 예수님의 모친을 모셨고, 나머지 그 자리를 피해 숨었던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모두 순교로 생을 마쳤다고 교회사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T. W. Hunt가 쓴 <그리스도의 마음>에 의하면, 마지막까지 예수님의 편에 남아있었던 사람들은 23명 정도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만나주신 맨 처음 사람은 예수의 시신을 가져다 자신 소유의 무덤에 넣어 둔 아리마대 사람 요셉도 아니고, 자신이 죽는 것처럼 가슴 아팠을 모친 마리아도 아닌, 복음서에 언급도 없었던 막달라 사람 마리아였습니다. 예수님은 왜 막달라 마리아에게 자신이 살아난 모습을 먼저 보이셨을까요?

     

    3. 주님의 은혜에 반응한 여인

    이 여인은 귀신들림으로부터 온전함을 얻은 후 자신을 구원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잊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잡히시기 전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다 있었지만 특별히 예수님께서 기도할 동안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늘 예수님 곁에 가까이 있었던 제자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이 잡히실 때 다 도망갔습니다.

     

    예수님 옆에는 언제나 남자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십자가를 바라보던 사람들은 남자 제자들이 아니었고 여인들이었습니다. 제자의 도를 가르쳐주고 있는 마가복음을 보면, 마가복음 1장에서 8장까지는 예수님의 사역 중 특별히 귀신들린 사람들과 병자들을 고치는 사건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고, 군대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시고, 열병 있었던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시고,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손마른 사람을 고치시고, 열두 해 혈루증 앓던 여인을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끝까지 주님을 따르던 사람은 얼마나 있었습니까? 이것은 구원의 은혜를 받고 그 은혜에 감사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 11절 이하를 보면,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함으로 열 사람 모두 몸의 깨끗함을 받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아홉 명은 깨끗함을 입은 후 각기 자기 길로 갔지만,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만은 예수께 돌아와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렇듯 예수님을 믿고 순간적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 받고자 하는 사람은 많지만,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감사로 보답하는 사람은 극히 드문 법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귀신들림에서 해방 받고, 그 후로 조용히 주님과 제자들을 섬겼습니다. 자기를 들어내지 않고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녀가 주님을 끝까지 섬긴 것은 자신이 받은 구원의 은혜를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4. 주님을 사랑한 여인

    막달라 마리아는 안식 후 첫 날 동트기도 전에 예수님의 시신이 안치된 무덤으로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요한복음은 막달라 마리아(요 20:1) 혼자 갔다고 했고, 마가복음은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막 16:1), 이 세 여인이 무덤으로 갔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이 계신 무덤으로 간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하고 간 것은 물론 아니었습니다. 그냥 걱정이 되어 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시신은 안식일 준비 일에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에 의해 서둘러 안치 되었고, 또한 안식일에 무덤에 갈 수도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했던 여인들의 마음은 애가 탔을 것입니다. 유대 관습은 시신이 부패할 때 나는 냄새를 줄이기 위하여 향품과 함께, 몰약과 침향이 섞인 세마포로 시신을 감쌌습니다.

     

    시신을 잘 처리하지 못했다는 안타까움과 온갖 이해되지 않는 자연 현상과 함께 여인들은 복잡한 미증유의 이틀 밤을 보냈을 것입니다. 물론 제대로 잠도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안식일 후 첫날 새벽, 지난 금요일에 예수의 시신을 두었던 곳을 확인한 막달라 마리아(막 15:47)는 그냥 예수님께로 달려간 것입니다.

     

    그녀는 예수님께 무엇을 기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의 순간 아무런 기적과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 예수였지만 그녀에게는 그것이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귀신의 속박에서 구해주고, 자신에게 자유와 새로운 생명을 주신 주님일 뿐입니다.

     

    지금 막달라 마리아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그냥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사랑에 무슨 조건이 있겠습니까? 사랑엔 조건이 없습니다. 조건이 있고 무엇을 기대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은 진정으로 주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정치적 메시야요,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이 될 것으로 기대했고, 자신들도 저마다 높은 자리를 기대했습니다. 무엇을 기대하고 따랐던 대상으로의 예수였기에 그들은 진정으로 주를 사랑하지 않은 것입니다. 나중에 나오는 이야기이지만,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질문한 것이 무엇입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아닙니까?

     

    진정한 사랑은 그냥 함께함으로 소중한 존재임을 서로가 믿을 때 가능해집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하며 무덤으로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사랑했기 때문에 간 것입니다. 세상 학문은 이치를 따집니다. 이성으로 판단을 하고, 논리로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관계가 있습니다. 바로 사랑의 관계입니다. 사랑은 그냥 좋고, 그냥 함께 하고 싶은 것입니다. 논리와 이성이 개입된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한 여인이었습니다.

     

    5. 그냥 사랑하십시오.

    여러분, 지금 당신과 함께 사는 사람들, 가족 공동체와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사랑하십니까? 그들이 아플 때나 병들었을 때나 죽었을 때도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러한 삶을 산다면 당신은 진짜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아가파오)?"라고 물으시니까 시몬은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필레오) 줄 아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아가페는 무슨 대가를 바라거나, 보상을 바라는 사랑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의 부활의 기쁨을 맨 처음 맛본 사람은 다름아닌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순수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존재만으로 감사하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잃은 슬픔에 울던 이 여인에게 부활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은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 20:15)라고 물어보십니다. 이 여인은 꿈에도 그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님인 줄 몰랐고, 처음엔 무덤을 지키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야”라고 그녀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녀는 심장이 멈추는 듯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길 원하십니까? 막달라 마리아처럼 구원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사십시오. 그리고 날 구원하신 예수님을 그냥 사랑하십시오. 감사와 사랑, 이것이 부활의 주님과 함께하는 마음의 열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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