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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교회력에 따른 본문 중심 설교 2011. 12. 26. 01:54


    성탄절[20111225]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눅 2:25-33)


    트루디 김 사모님의 <심겨진 그곳에 꽃피게 하십시오>라는 책이 있습니다. 트루디 사모님은 미국에서 김장환 목사님과 결혼하고 곧바로 배를 타고 한국에 옵니다. 수원에 정착하여 교회를 세우고 목회하는 이야기를 자서전적으로 쓰면서 자신의 삶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제목으로 삼은 ‘Bloom where you are planted’ 라는 말은 지금 나 자신이 서있는 그곳에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하심이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하는 격언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예상치 못한 어려움들을 경험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는 불평과 원망이 계속 생긴다면 그 자리를 헤어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요셉 이야기는 우리가 경험할 수도 있는 예상치 못한 인생의 수렁에서 어떻게 삶을 대해야 할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이 자신을 팔아넘기는 배신을 경험했습니다. 하루아침에 종의 신분으로 전락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억울하게 감옥에서 보낸 세월도 있었습니다.


    요셉도 인간인데 왜 억울함이 없고, 눈물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그러한 과정 속에서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는 사건을 사람과의 관계에 매여서만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음을 헤아리고 살았습니다. 위기의 상황에서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평상시 그의 생각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 39:9)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신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아니하신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시 121:1) 내가 지금 서있는 자리, 나에게 처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생각해 보는 것, 현재만 볼 것이 아니라 미래를 기다리는 것, 땅의 현상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때를 기다리는 것, 이것이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마지막 때 넘어지지 않고, 타락하지 않기 위해 우리 보고 ‘이렇게 살아라’ 하고 보여주시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창 6:16) 우리는 위로 신앙의 창을 내야 합니다. 우리의 시선을 빼앗는 옆의 창문은 닫아버려야 합니다. 홍수가 나서 세상을 덮었을 때 노아 식구들이 옆 창문이 있어서 세상을 보았다면, 더럽고 추악하고 끔찍한 일들만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옆의 창문을 막아 죄의 유혹을 차단하라고 지금도 우리에게 명령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이 네 종류 밭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6)라고 하셨는데, 이는 천국의 비밀을 깨닫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천국의 비밀을 누가 깨닫습니까? 바로 위로 창이 열린 사람입니다. 그러면 위로 창이 열린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말할까요?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그런 사람을 보게 됩니다. 바로 시므온이라는 사람입니다.


    시므온은 대제사장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시므온은 율법에 매여 있는 수준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수준임을 알 수 있습니다.(갈 5:18)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눅 2:25-27)


    시므온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 상태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바라는 사람은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구원을 바라며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기도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로마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줄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바라는 사람은 많았겠지만 이스라엘의 위로를 바라면서 하나님의 지시를 기다리는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므온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지시로 자신의 사명을 깨달으며 성전에서 기도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구원의 때가 임했습니다. 아기 예수가 성전에 나타나심을 본 것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구원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므온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아기가 누구인지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찬송합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눅 2:30, 32)


    구원은 예수님을 만나는 사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귀신에게서 해방되었습니다. 나병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니 나병이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맹인은 눈을 떴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일이 구원의 사건입니다.


    헬라어로 시간에는 크로노스와 카이로스가 있습니다. 크로노스는 물리적인 시간 개념을 말하지만 카이로스는 하나님의 구속의 시간을 말합니다. 예수 탄생의 사건은 하나님이 어떠한 방식으로도 우리에게 역사하실 수 있다는 메시지를 줍니다. 초월자 하나님이 인간 세계에 들어온 카이로스입니다.


    이런 카이로스의 경험을 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세 사람의 동방 박사인 카스파르, 발타사르, 멜키오르가 그랬고, 천사가 전한 기쁜 소식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행한 목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지금 시므온이 카이로스의 경험을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경험되는 카이로스의 시간이 우리에게도 있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 구원이 나에게도 이루어지는 시간이 있길 원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성탄절이 와도 더 이상 예수를 찾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다는데 놀라지도 않고, 관심도 없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예수를 기다리고, 내 안에 예수가 잉태되길 기다리는 마음들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위로 난 창을 보기 보다는 옆의 창을 통해 세상이 주는 재미로 위안을 삼고자 합니다.


    예수 보물이 나에게 있습니까? 비록 세상 풍조는 예수보다 다른 것들에 가치를 높여도, 우리는 예수가 영원히 동일하신 메시야임을 잊어서는 않되겠습니다.(히 13:8) 하나님은 오늘날도 여전히 시므온 같은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세상의 유혹에 시선을 빼앗기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성전에 오실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이 시대의 시므온이 되길 원합니다. “내 눈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라는 찬송의 카이로스가 반드시 우리 입에서 나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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