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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가 나를 무엇보다 더 사랑하느냐?
    교회력에 따른 본문 중심 설교 2012. 2. 26. 02:59

    사순절 첫째 주일[20120226]

    네가 나를 무엇보다 더 사랑하느냐?(창 22:1-4)


    사순절 첫째 주일 아침에 함께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도우시고, 준비하시고, 위로하시는 크신 은혜가 임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순절은 교회의 전통이 만든 절기입니다. 부활절을 앞둔 40일간의 영적 여정으로 무엇보다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묵상하는 시간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이번 사순절 기간을 통해 우리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 볼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우리가 사순절을 여러 해 통과했다면 예수님처럼 고난을 통과하는 신앙으로 성숙해져야 될 줄 믿습니다. 신앙생활 한 지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내면의 근본 변화가 없다면 우리 자신의 신앙의 상태를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끊임없이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말이라면 우리 안에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순절은 우리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는 귀한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순절 기간 우리 영혼의 환우(換羽)를 통해 죄의 누룩을 제거하고, 신앙의 방향이 잘못 되었으면 방향을 바로 잡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속도가 아무리 빨라도 방향이 잘못되면 그것은 가면 갈수록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속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방향입니다. 사순절에 우리의 신앙의 방향과 근본에 대해 다시 한 번 점검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창세기 22장의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하는 이 사건은 성경에서 예수님의 구원을 예표하는 결정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입니다. 저는 오늘의 본문을 묵상하다 이 사건이 단순히 아브라함의 순종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한 교훈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본문 22장 1절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자신의 명령에 대해 아브라함의 순종 여부를 시험하고 있다는 것이 표면적인 해석으로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 이면에는 신앙의 가장 근원적인 물음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창세기 22장의 사건을 통해서 오늘 우리 안에 있는 신앙의 근저를 묻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신앙생활이란 한 마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동기요, 출발이요, 방향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의 씨를 약속 받은 때는 아브라함의 나이 75세가 지난 때입니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나 약속의 자녀 이삭을 얻습니다. 아브라함의 또 다른 씨 이스마엘이 있었지만 이삭이 아주 어렸을 때 사라의 질투로 하갈과 함께 집에서 내보내게 됩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에게 있는 후손이라고는 이삭 하나가 유일합니다.

    본문에서 이삭의 나이는 번제로 쓸 나무를 질 정도니까 어림잡아 10대로 보입니다. 이삭이 태어나고 자라는 10여년의 세월이 어떠했는지 성경은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어느 날 갑자기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아,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이때 아브라함의 머릿속에는 순간적으로 어떤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을까요? 우리가 아브라함의 심정이 아니라 헤아릴 수는 없지만 추측해 보건데 셋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아니면 ‘아들을 죽이라고 하니 이 아들을 어떻게 죽일 것인가’를 궁리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때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거나, 아들에 대해 생각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론을 해봅니다. ‘내가 하나님께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말이 없습니다. 다음 날 아침 부지런히 준비하여 두 종과 이삭을 데리고 길을 떠납니다. 삼일 길이 암시하는 것은 그것이 아브라함에게 긴 침묵과 고독의 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22장 4절에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으로 제대로 걸어 온 것입니다. 여기에 엄청난 상징적 메시지가 있습니다. 신앙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한 것처럼, 결국 아브라함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창세기 22장 1절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시험하신 것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아들을 주고 나서 보니까 아브라함의 삶의 중심에 어느덧 하나님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아들이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더 사랑하는지 아니면 아들을 더 사랑하는지 그것을 시험하고 계신 것입니다.

    ‘나에게 신앙이 있다’라는 것은 ‘내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다’라는 것입니다. 내 중심에 하나님이 사라질 때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내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그 무엇이 채우게 됩니다. 그것이 사람일 수도 있고, 사물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의 중심에 있지 않으면 수천수만개의 우상들이 비어있는 하나님의 자리로 쉽게 침입해 들어오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세가 모세오경을 어떤 순서로 기록했을까를 잠깐 생각해 보겠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명과 규례들을 기록하기 위해 먼저 레위기를 썼습니다. 이러한 규례들을 주신 배경을 쓰기 위해 출애굽기를 기록하였고, 출애굽의 역사 가운데 경험한 하나님을 기록하기 위해 창세기를 썼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창세기 22장을 보면 모세가 창세기 22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하나님에 대한 것과 아브라함에 대한 신앙의 테스트는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의 첫째 계명을 적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

    우리는 십계명이 모세가 사십일 밤낮으로 하나님과 함께 한 하나님 체험에서 나온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십계명을 대할 때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경험할 수 있어야 진정한 십계명의 의미와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십계명이 주어졌기에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계명들을 왜 주셨는지를 묵상해야 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십계명을 주신 목적과 하나님의 의도를 알 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나 자신은 어떤 사람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십계명이 주어졌으니 무조건 지키면 된다가 아닙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한다고 해도 지켜지지 않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셔서 주신 언약관계 유지법이고, 언약의 당사자인 이스라엘은 구원의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십계명을 지킬 때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내 힘으로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신 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증언과 비방이다”라고 말씀하실 때(마 15:19)에 이사야 말씀을 인용하시는데,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고 하셨습니다.(마 15:8) ‘십계명을 지키고 나가는 힘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십계명의 첫째 계명이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다른 신들도 있어서 그것을 인정하시는 표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 가나안 일곱 족속을 쳐서 쫓아내라고 명령하십니다.(신 7:2) ‘내가 돕는다. 그러니 너희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고 전멸시켜라’고 명하십니다.(신 7:2) 성경은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들을 놔두면 그 족속의 딸들이 이스라엘 아들들을 유혹할 것이고, 그래서 여호와를 떠나게 하고, 그들의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신 7:4) 우리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새기지 않으면 그때부터는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어떤 신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씀을 통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일어난 한 사건을 주목해봅니다. 베드로는 배를 소유하고 있는 어부입니다. 어부로 잔뼈가 굵은 사람인데, 어느 날 그의 인생에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날은 밤새 단 한 마리도 고기를 잡지 못했습니다. 이상하게도 그렇게 허탈하게 밤이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날이 밝았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오셔서 베드로의 배에 오르십니다. 배 위에서 육지에 있는 따라온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설교를 마치시고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아마 베드로가 예수님의 설교를 듣지 못하고 이런 명령을 받았다면 십중팔구 베드로는 ‘모르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하고 집에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이런 명령이 내려지자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눅 5:5) 하고 다시 바다로 나아갑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던 ‘내 경험, 내 지식, 내 의지’를 예수님의 말씀 앞에 다 내려놓았습니다. 베드로가 믿고 의지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니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엄청나게 많은 물고기가 그물에 걸려들어 그물이 찢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말하길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 왜 베드로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합니까? 지금까지 베드로는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어느 정도는 먹고사는 사람입니다. 나병환자도 아니고 세리 같은 직업도 아닙니다. 당시로서는 어느 누구도 베드로보고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알고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과 3년을 동거동락하며 놀라운 일들을 경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한 3년의 결말은 배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베드로는 다시 어부 생활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그날도 역시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일이 생깁니다. 낙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들리는 음성이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요 21:6)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입니다.

    베드로와 예수님은 함께 아침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질문 안에 심오한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세 번이나 부인했지, 그리고 나를 떠났지. 그래도 난 넌 사랑하고 있단다. 베드로야, 네가 비록 나를 배신했지만 난 널 포기한 적이 없단다. 네가 비록 실패했지만 그래도 난 널 사랑한다. 베드로야 이제 너도 나를 사랑해줄 수 있겠니? 베드로야 이제 너도 머리로 나를 필레오한다 하지 말고 중심으로 아가페할 수 있겠니?’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 옛날 아브라함을 찾아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음성과 동일한 음성입니다. ‘네가 나를 이삭 보다 더 사랑하느냐?’ ‘내가 너에게 이삭을 주었다. 그런데 너는 나를 바라보지 않고 이삭만 바라보느냐? 내가 너를 부르고, 인도한 여호와다 그런데 너는 이삭에게 모든 사랑을 쏟아붓느냐?’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이 무슨 뜻인지를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삼일 길을 걸어 하나님이 지시한 산으로 향했다는 본문의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지난 10년간은 하나님이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자신이 낳은 피붙이가 있었고,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한 우상이 있었고, 유일신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한 독자가 있었고, 전능자를 대신한 이삭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지난 삼일 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것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제 삼일에 아브라함은 눈을 들어 하나님이 지시한 모리아 산을 바라봅니다. 다시 한 번 신앙의 본질과 방향을 바로잡게 된 순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사순절을 통해 하나님을 대신하여 자리 잡았던 내 마음의 우상들을 제거하고, 하나님이 가리키시는 신앙의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이키는 회복의 시간, 구원의 시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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