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누가 제자입니까?
    교회력에 따른 본문 중심 설교 2010. 6. 2. 07:59

    삼위일체주일[20100530]

     

    누가 제자입니까?(눅 9:57-62)

     

    오늘 본문에는 세 사람이 나옵니다. 첫 번째와 세 번째 사람은 자기 스스로 예수님을 따르려고 했고, 두 번째 사람은 예수님의 요청에 의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세 사람 모두 예수님을 따르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했다는 점입니다.

     

    누가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본문은 이 세 사람을 통해서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제자는 어떠한 사람인지를 말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의 제자는 고난을 각오하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먼저 첫 번째 사람의 경우입니다. 57절에 “길 가실 때...”라고 시작합니다. 그 길은 51절에 보니까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는 여정임과 동시에 또한 그 길은 말 그대로 누가가 강조하는 제자의 길, 즉 제자 됨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길 가실 때”는 본문에서 제자의 도를 전하려는 복선과도 같습니다.

     

    그 길을 가는데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어디로 가든지 나는 따르겠다”라고 선뜻 말합니다. 얼핏 보기에는 대단한 결단을 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제자가 되겠다는 말 속에는 즉흥적인 결단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 사람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이 사람의 이름을 알 수는 없지만, 마태복음 8장 19절을 보면 이 사람의 신분은 알 수 있는데, 서기관입니다. 서기관은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이었고, 어느 정도 권력과 명성도 가진 계층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돈 있고, 신분 있는 사람이 찾아온다면 환영하지 않을 교회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는 이런 사람이 자신을 따른다고 했을 때 환영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58절,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집이 있지만, 나는 머리 둘 곳도 없다.” 무슨 말입니까? 나를 따르라는 말입니까? 따르지 말라는 말입니까? 동문서답처럼 보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완곡하게 거절하시는 말씀입니다.

     

    “너 지금 내가 어디로 가든지 나를 따르겠다고! 내가 가는 길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길이 아니다. 고난을 각오해야되!” 이런 말입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가는 자는 사람들의 배척, 환란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 길은 값 비싼 대가를 치르는 길입니다. 누가는 의도적으로 오늘 본문 앞에 그런 이야기를 삽입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9장 52절 이하에,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

     

    그러면 이 사람은 왜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했을까요? 마태복음 8장을 보면, 이 서기관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한 배경 전에 두 가지 사건을 경험합니다. 예수님이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시고, 말씀으로 병든 자를 고치시는 권능의 현장을 직접 눈으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8장 18절을 보면 예수님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많은 인기를 누립니다. 이 서기관은 예수님의 권능을 보고, 예수님 곁에 있으면서 공짜로 먹고 자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 사람은 그 자체에 만족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 이런 환대, 화려함, 영광 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스스로 나아와 “선생님,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이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따르라고 말하고 직접 말하지 않고,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집이 있지만, 나는 아무 것도 없다. 그래도 나를 따르겠는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서기관과 같이 이 세상에서 성공, 출세, 부자가 된다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제자의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복 받아도 감사하고, 예수님 때문에 어려움을 겪어도 기뻐하며 믿음으로 인내하며 이겨내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자체로 만족해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사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님이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감정 충만이 아니라 성령 충만으로 살아야 합니다.

     

    2. 예수님의 제자는 우선순위가 분명해야 합니다.

    두 번째 사람은 예수님께서 먼저 제자가 되라고 초청하십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따르지 안겠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따르기는 하겠는데 한 가지 조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 장례 좀 치르고 오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우리는 이 말씀을 예수님이 부모 공경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 사람 역시 예수님의 영광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은혜 받는 자리에서 아멘, 아멘 크게 외쳤던 사람입니다. 은혜 받는 자리에서 은혜 받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세상으로 나아가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전파되게 하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고령의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아마 오늘 내일 하는 아버지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진작 본인은 예수님 주변에서 은혜 받고 눈물 흘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이 사람이 아멘, 아멘은 하는 데, 결단하는 행동은 없고 뜸들이고 느그적 거리는 모습에 일침을 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에게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예수님이 이 사람의 상황을 모르고 계실 리는 없습니다. 이제 이 사람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직접 듣습니다. 그러나 듣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잊고 있었던 고령의 아버지가 생각난 것입니다.

     

    “아버지가 곧 돌아가실지 모르는데, 일단 집에 가서 보살피고 따르면 안되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런 사람에게 60절로 답하시는데, 이는 영적으로 죽은 자 살리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집집마다 세 개의 달력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이 만들어 놓은 달력입니다. 또 하나는 마귀가 침상에 달아놓은 달력인데, 이 달력은 365일 언제나 내일입니다. 오늘만 날이냐 내일도 있지않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달력은 365일이 항상 오늘입니다. 오늘 기도하고, 오늘 충성하고, 오늘 사랑하라...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여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 제자의 우선순위입니다. 이 세상에는 멀쩡하게 살아있는 것 같으나 죽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먹고 마시고 입고 자고 시집가고 장가가는데 빠진 사람들, TV와 게임에 빠져 사는 사람들은 살았으나 죽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난 사람들은 살았으나 죽어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을 살리는 일이 가장 중요한 제자의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3. 예수님의 제자는 한 눈 팔지 않고 앞만 보고 가야합니다.

    세 번째 사람 역시 먼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는 했지만 먼저 가족에게 작별인사하고 오게 해 달라고 조건적인 요구를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예수님은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사실 집에 가지 말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마음을 잘 아셨습니다. 이 사람은 가족에 대한 염려로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 미련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정에 약하고 눈물에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집에 들어가면 다시 나오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약함을 아셨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쟁기를 잡고 뒤를 보는 사람으로 비유합니다. 쟁기 잡고 뒤 돌아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삐뚤삐뚤 뒤죽박죽 됩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100세에 낳은 아들을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내와 상의했습니까? 안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내와 상의하면 아내가 뭐라고 했겠습니까?

     

    여러분 내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뒤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수많은 인간적인 정들이, 수많은 유혹들이 제자의 발목을 붙잡습니다. 다 뿌리치고 주님만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가정을 등한히 하고,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디모데전서 5장 8절에서 보듯이 우리는 믿음으로 가족을 돌봐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가정에 충실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위해서는 가정이 방해거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는 정에 약한 사람에게 주는 경고의 말씀이기도합니다.

     

    롯의 아내는 뒤 돌아보다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세상의 정과 유혹 앞에 머뭇거려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앞만 보고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야합니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