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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로의 뱀을 삼킨 여호와의 능력
    교회력에 따른 본문 중심 설교 2012. 2. 5. 12:47


    주현절 후 다섯째 주일[20120205]

    바로의 뱀을 삼킨 여호와의 능력(출 7:8-13)


    주현절 후 다섯째 주일을 기억하며 주님의 동산에 모여 예배드리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임재의 감격이 넘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대인의들의 지혜 교육은 유명합니다. 우리나라 어머니들은 자녀가 학교 갈 때 ‘공부 열심히 해’라고 하지만 유대인 어머니들은 ‘질문 많이 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얼마나 지혜를 소중히 여기는 지는 탈무드에 잘 나타납니다. 나치에 포로로 잡힌 유대인 한 사람에게 독일군이 제비뽑기를 해서 풀어주겠다고 했습니다. 하나의 종이에는 사형이 적혀있고 하나에는 자유가 적혀있다고 말하고 하나의 종이를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이 유대인은 지혜를 달라고 기도 했습니다. 분명히 둘 다 사형이라고 적혀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의 종이를 뽑아 입에 넣고 삼켜버립니다. 무엇이 적혀있는 줄 알고 그것을 먹어 버리냐는 독일군의 말에 남아 있는 것을 펴보면 알 수 있지 않냐고 응수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며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얻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지혜 있는 자는 내가 가고 싶은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로 행합니다. 지혜로운 자는 탐욕의 길이 죽음의 길임을 깨닫고, 의의 길, 생명의 길을 선택합니다. “지혜로운 자는 위로 향한 생명 길로 말미암음으로 그 아래에 있는 스올을 떠나게 되느니라.”(잠 15:24)

    오늘은 모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모세가 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라는 부르심을 받은 나이를 80세가 다 되었을 때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동안 하나님은 모세와 함께 하지 않으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때어날 때부터 줄곧 함께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장 1절 이하를 봅니다.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어,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출 2:1-2)

    바로는 히브리인들의 번성함을 보고 산파에게 명하기를 그들이 아이를 낳으면 아들이면 나일강에 버리고, 딸이면 살려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므람과 요게벳(출 6:20)은 아들을 낳아 석 달을 숨겼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분명 산파를 통해 아이를 낳은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숨겨서 몰래 낳았다고 해도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큰일입니다.

    2장 2절에 “석 달을 숨겼다”고 했습니다. 석 달을 숨긴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어린 아이의 울음은 3개월 이전에는 남자 아이인지, 여자 아이인지 구분이 어렵지만 3개월이 지나면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었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아므람과 요게벳은 이제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것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 아이의 운명을 갈대상자 하나에 맡기고 강에 띄워 보낸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2장 3절 이하를 봅니다.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섰더니,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 강 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출 2:3-6)

    아므람과 요게벳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아이의 운명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어쩔 수 없어서 아이를 갈대상자에 넣어 악어가 득실거리는 나일 강에 운명을 맡긴 것이 아닙니다. 4절과 5절을 잘 보면 바로의 딸이 목욕하는 시간이 언제인지를 알아내어 그 때를 잘 맞추어서 공주나 시녀들이 볼 수 있는 거리에 갈대상자를 놓아두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공주가 갈대상자를 열어보니 히브리인의 아기가 있었습니다. 그 순간 공주는 이 아이가 당연히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공주는 이 아이를 살릴 마음이 갑자기 생깁니다. 왜 그럴까요? 미드라쉬의 해석에 보면, 공주가 갈대상자를 열자 히브리 아이가 웃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인에게 태어난 아들을 죽여야 된다는 생각이 들 때,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아이의 뺨을 때려 울게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이를 울게 하여 공주의 모성애를 자극하게 만든다는 해석입니다.

    모세의 생애를 통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출생 때부터 함께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로 쓰시기 위해 태어나면 죽는 운명의 시대에도 부모의 지혜로 생명을 건졌습니다. 비록 애굽의 왕궁에서 애굽의 학문을 배우고 자랐지만 하나님의 준비하시는 기간이었습니다. 그는 장성한 후 하루아침에 왕자에서 도망자 신세가 되어 미디안에서 40년의 세월을 보냅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3장에서 드디어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부르시고 소명을 일깨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80년 동안 모세와 함께 하지 않은 적은 없습니다. 직접 나타나지 않으셨을 뿐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모세의 나이는 80세, 아론은 83세,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하시고, 아론은 모세의 대언자가 되게 하시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내보내게 하라는 말을 바로 앞에서 하게 하십니다.

    바로는 너희가 말하는 신이 히브리인들을 보내라고 했다면 무슨 이적을 보이라고 합니다. 이때 아론은 바로 앞에 자신이 들고 있는 지팡이를 던집니다. 그러자 이 지팡이가 뱀으로 변합니다. 하지만 바로는 이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술사도 다 할 수 있는 속임수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이 사건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뒤이어 나올 10가지 재앙을 우리는 알고 있고, 출애굽의 절정 홍해가 갈라지는 사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0가지 재앙의 전초전과도 같은 지팡이가 뱀이 되는 이적을 간과해 버리곤 합니다. 그런데 저는 10가지 재앙과 홍해를 건너는 사건 못지않게 지팡이가 뱀이 되는 이적을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건에 놀라운 복음이 숨어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왜 바로 앞에서 보이는 첫 번째 이적이 지팡이가 뱀이 되는 이적인지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일 강을 중심으로 한 이집트는 고대 문명의 발생지로 7천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는 상 이집트와 하 이집트의 두 국가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기원전 3천년 경 메네스 왕에 의해 통일왕국을 이룹니다.

    상 이집트에서는 태양신을 섬겼는데 태양신의 상징이 독수리입니다. 그리고 하 이집트에서는 왕의 상징으로 뱀을 우상화했습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뱀이 모든 악을 물리치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고, 뱀은 주기적으로 낡은 허물을 벗기 때문에 영생과 치유의 상징으로도 생각했습니다. 이집트 박물관에 전시된 투탕가멘(Tutankhamen)의 황금 마스크에 보면 이마에 두 동물의 머리상이 있는데 바로 독수리와 코브라 뱀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종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모세를 부르시고 바로 앞에서 지팡이로 뱀을 만드신 이적은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바로가 섬기는 뱀 곧 사탄의 제국에서 구원하신다는 증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저주에서 축복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우리의 거처를 옮기시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참 재미있습니다. 지팡이를 뱀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가 그것을 보자 비웃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런 마술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바로도 그것을 보고 마술사들을 부릅니다. 그리고 그대로 해보라고 합니다. 본문 12절에 애굽의 요술사들도 “지팡이를 던지매 뱀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던진 것은 지팡이가 아닙니다. "요술로 그와 같이 행한"(출 7:11) 것입니다.

    속임수를 쓴 것은 아론이 아니라 애굽의 요술사들입니다. 이집트 룩소(Luxor)의 세티 1세의 분묘에 그려진 벽화를 보면 애굽의 요술사들이 코브라 뱀을 가지고 최면 거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 있습니다. 고대 애굽의 술사들은 뱀에게 최면을 걸어 뱀이 뻣뻣하게 마비가 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집어서 던지면 뱀이 다시 움직이는 속임수 마술을 행했습니다. 바로는 이런 것들을 보았기 때문에 모세와 아론이 그들의 술사와 같이 속임수를 쓰는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이어지는 장면이 압권입니다. 바로의 술사들의 뱀을 아론의 지팡이가 변해서 된 뱀이 잡아 삼겨 버립니다. 여호와의 능력이 바로의 뱀을 멸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는 이것을 보고도 마음이 완악해지고 이스라엘 백성 보내기를 거절합니다.

    오늘 본문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자 하는 걸까요? 우리는 바로의 앞에서 지팡이가 뱀으로 변하는 이 사건을 통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영원한 신은 허물 벗는 뱀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바로가 섬기는 눈에 보이는 뱀은 가짜 신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참 신이다.’라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는 특정한 왕의 이름이 아니라 애굽 왕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바로라는 이름은 ‘집의 주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출애굽기 7장 4절을 보면,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이라고 칭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의 수하에 있습니다. 바로는 뱀을 숭배하는 사탄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은 사탄의 지배에서 우리를 건져내시고자 그 옛날 모세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사건은 첫째 아담을 넘어뜨린 뱀에게 하나님이 주셨던 심판의 메시지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많은 이적과 기사를 통해 구원의 표를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여전히 마음이 완악한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신들(고후 4:4), 세상의 지혜(고전 1:20), 세상의 풍조(엡 2:2)를 따르는 것이 지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는 길이 지혜입니다. 사탄은 지금도 화려한 모습으로 우리의 눈을 속이고(고후 11:14), 세상의 지위와 학위로 우리의 이성을 속입니다.(딤후 4:3)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고전 1:18) 저는 여러분이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이 되시고, 지혜가 되신다”(고전 1:30)는 진리를 믿는 복된 사람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론의 지팡이가 뱀이 되어 애굽의 다른 뱀들을 잡아 삼킨 것처럼,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은(요 1:14) 죄의 세력을 파괴하시는 구원의 표상이 되십니다.(요일 3:8) 예수님의 구원의 십자가를 더욱 단단히 붙들 수 있는 것은 바로의 뱀을 삼킨 여호와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한 주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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