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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을 깨닫는 자만이 십자가의 길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교회력에 따른 본문 중심 설교 2013. 3. 4. 00:00

    사순절 셋째 주일[20130303]

     

    복음을 깨닫는 자만이 십자가의 길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막 14:3~9)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한번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도 육신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한 번의 육적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혹자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꼭 십자가 위에서만 죽으셔야 했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을 운명으로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을 묵상할 때 예수님이 왜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는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였다는 사실을 복음서는 증거 합니다.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예수님도 인간적으로 죽음을 받아들이기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바울이 깨달은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가 인류에게 전해주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구원 이전에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인류의 눈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니까 하나님은 독생자를 십자가에 매달아 그 몸을 깨뜨려서라도 관심을 두려 하셨던 것입니다.(요 3:14)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곧 기도요, 기도는 곧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의로 판단하지 않으셨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행하셨습니다.(요 12:49) 예수님의 순종의 마침이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십자가, 그것은 우리 인류가 살아갈 도리를 보여주신 표상입니다. 십자가에는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라고 외치는 예수님의 피묻은 메시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의 정수가 몸소 지셨던 십자가에 새겨져 있습니다. 사순절기 십자가를 묵상하며 예수님의 순종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따르는 무리들이 베다니의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는 가운데, 같이 있던 사람들에게 의아심을 일게 한 어떤 여인의 행동을 이야기합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머리에 매우 값진 향유가 담긴 옥합을 깨뜨려 그 전부를 부었습니다. 이 특별한 이야기가 이 시대 우리에게 전해 주는 영적인 교훈이 무엇인지 함께 귀 기울여 봅니다.

     

    본문 4~5절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예수님은 기도하시면서 항상 하나님의 뜻을 구하셨는데 이 사건은 예수님이 자신의 때가 가까이 왔음을 깨달은 시점에 나병환자였던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일어났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과 아주 가까운 작은 마을로(요 11:18),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곳이기도 합니다. 이 일로 베다니는 예수님을 환대하는 분위기가 되었습니다.(요 12:2)

     

    본문 3절을 읽어봅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잔칫집 분위기를 깬 것은 이 여인의 행동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여인의 행동을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여인을 향해 어떤 사람들은 화를 내면서 책망하였습니다. 아깝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의 이런 행동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는 가운데 죽으심이 있을 것을 미리 깨닫고 한 것이지 그렇지 않고 행한 일인지는 본문이 침묵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 여인이 이렇게 한 행동에 대해서 복음의 본질을 깨달은 자로서의 반응이 나타난 것임을 예수님께서는 친히 인정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6절)

     

    예수님은 사람들의 반응과는 다르게 이 여인의 행동을 보고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고 반응하십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7~8절)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이 여인의 행동에 대해 일면만을 보고 책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의 행동을 보고 ‘자신에게 좋은 일’을 했다고 칭찬하십니다.

     

    여기서 ‘좋은’으로 번역된 ‘카로스’는 ‘아름다운, 칭찬할만한, 경탄할만한’의 의미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대까지도 넘어서 예수님을 ‘감탄하게’ 한 이 여인의 ‘아름다운 일’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두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지 좀 더 생각해 봅니다.

     

    먼저 이 여인은 자신이 소유한 값진 것의 ‘전부를 드렸습니다.’(3절) 뿐만 아니라 ‘힘을 다해 드렸습니다.’(8절)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온전한 헌신'이 이 여인에게 있었습니다.

     

    복음을 통해 죄 용서 받음을 깨달은 사람은 받은 은혜만큼 반응합니다. 마가복음 12장에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외식하는 서기관들은 높은 자리만 탐하고 가난한 자의 소유까지 빼앗으려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한 가난한 과부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 생활비 전부인 두 렙돈을 헌금하였습니다. 이 두 이야기는 복음을 깨닫지 못한 종교인과 복음을 깨달은 신앙인의 극명한 차이를 대조하며 들려주신 말씀입니다.(막 12:38~44)

     

    당시 귀한 손님이 방문하면 향유를 발라드리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이 ‘매우 값진 향유’를 전부 드린 모습은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표현으로써 그녀가 할 수 있는 섬김의 위치에서 자기의 유익을 조금도 아깝게 여기지 아니한 온전한 헌신을 보여줍니다.(고전 13:5)

     

    다음으로 기억해 보아야 할 것은 이 여인에게는 '은혜의 때'를 아는 지혜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7절)

     

    그녀는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에 진실한 봉사를 행함으로 결과적으로 이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선행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은혜를 깨닫게 되는 그때에 결단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내일 일을 모르는 인생이 '내일 해야지' 할 때는 늦습니다. 성령님이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 은혜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고후 6:2) 이때 희생하고, 섬기고, 용기 있게 나아가면 하나님의 선을 이루게 됩니다.(롬 8:28)

     

    에스더도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연한 각오로 자신에게 주어진 지위와 기회의 때를 놓치지 않고 왕께 나아갔기 때문에 위기에서 자기 민족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에 7:3)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주신 지위와 물질, 기회를 자신의 욕심으로(요일 2:16) 헛되이 사용하면(고후 6:1) 악한 일을 하다 비참한 최후로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마 27:5)

     

    본문 9절의 예수님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열두 제자들도 이런 칭찬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이 여인처럼 우리도 복음을 깨달아 온전한 헌신으로 받은바 은혜에 응답하며 살면 ‘주님의 날’에 칭찬과 위로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마 25:21)

     

    ‘주님의 날’은 의인에게는 구원의 날이요 죄인에게는 심판의 날입니다. 이 땅에서 주어진 자기 십자가의 사명은 각자가 다릅니다. 그러하기에 자신의 십자가를 깨닫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만 하면 그 결과는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하나님의 때에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의 영적인 교훈을 정리해 봅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지만 복음의 본질을 깨닫지 못한 채 형식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미움과 다툼, 분쟁을 일으키고, 심지어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일까지도 저지르게 됩니다. 복음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면 공동체 안에 있어도 십자가의 길에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또한 자신의 삶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은 채 구원받았다고 착각하며 일그러진 자화상을 만들어갈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의 본질을 깨달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막 8:34)

     

    복음을 깨닫는다는 것은 복음이 내 삶에 들어와 나를 변화시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복음의 삶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는 선을 이루게 됩니다. 그 결과 우리의 결심과 태도, 열매를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며 천국을 상속 받게 하시는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기까지 순종하시면서 자신의 사명을 온전히 마치심으로 인해(요 19:30) 인류에게는 살 길이 열렸고(히 5:9) 하나님은 가장 뛰어난 이름으로 그를 높이셨습니다.(빌 3:9)

     

    저는 우리 모두가 예수님이 보여주신 순종의 의미를 깨달아 지금 나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말고, 십자가의 길에 순종하며 나아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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