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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가능을 가능으로 꿈 꾸어라.
    교회력에 따른 본문 중심 설교 2012. 5. 14. 13:09

     

    부활절 여섯째주일/어버이주일

     

    불가능을 가능으로 꿈 꾸어라.(눅 18:35~43)

     

     

    우리 주님의 부활의 기쁨이 이 시간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님들과 함께 하시기를 원합니다.

     

    지난 주 우리는 ‘둘이 한 몸을 이루라’는 영적인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 몸을 이루라’는 말씀은 단지 부부 사이의 관계(마 19:6)에 국한해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한 가정도 한 몸을 이루어야 하고(엡 6:4), 한 교회도 한 몸을 이루어야 하고(엡 5:32), 나아가 모든 믿는 자들이 한 몸으로 세워져 가야 한다는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엡 2:22)

     

    예수님께서도 이혼의 문제를 가르치시면서 창세기 2장 24절을 인용하시는데, 부부는 한 몸이기 때문에 다시 나누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은 이혼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짚으셨습니다. 그것은 마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마태복음 19장에서, 어떤 이유가 생기면 남자가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은지를 바리새인들이 시험하는 질문에 예수님이 답하시는데, 결국 모든 이혼은 남자가 마음이 떠난 것이 그 이유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격 차이 아니다. 돈 문제 아니다. 마음이 문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사는 것은 간음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마 19:9)

     

    예수님은 신앙생활의 본질이 우리가 마음을 어디에 두고,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달린 것임을 여러 차례 강조하십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다.”(마 15:19~20) 지금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어떤 마음을 먹고 있습니까?

     

    우리는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하며 신앙의 본질과 목표를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여기서부터 많은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비본질적인 것이 신앙의 목표가 되고, 사람이 만든 전통으로 교회를 만들어가는 일들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 문제는 우리가 믿고 있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아는 데에 기초합니다. 우리가 믿는 대상은 창조주 하나님이고, 죄인인 우리에게 돌아올 몫인 하나님의 진노를 십자가에서 대신 지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신앙의 목표는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길을 간 신앙의 선조들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결국 신앙생활이란 바라보아야 할 대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따라가야 할 대상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역시 바라보아야 할 대상을 바라보고, 따라가야 할 대상을 따라간 한 사람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는 귀한 말씀입니다.

     

    본문 35절을 봅니다. 예수님이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일어난 일입니다.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본문의 주인공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맹인’입니다. ‘여러 맹인’이 아니라 어떤 ‘한 맹인’입니다.

     

    이 맹인이 하고 있는 일은 구걸하는 일입니다. 물론 다른 맹인들도 구걸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인생이었습니다. 이 맹인과 다른 맹인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36~37절을 읽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우리는 여기서 이 맹인과 다른 맹인들과의 중요한 차이가 하나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생각의 차이입니다. 이 맹인은 자신이 맹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지금은 비록 구걸하며 살고 있지만 구걸하는 인생으로 계속 살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습니다. 구걸하며 남의 도움으로 먹고 살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맹인들은 자신들이 맹인인 줄 몰랐을까요? 물론 그들도 자신들이 맹인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다른 맹인들은 자신의 한계가 맹인이기 때문에 구걸하며 먹고 사는 인생으로 자신의 운명을 만들어버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더 나은 인생은 생각지도 못해본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그 자리에 여러 병자들도 있고, 다른 맹인들도 앉아서 구걸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운명을 구걸하는 인생으로 생각한 병자들과 맹인들은 무리가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도 돈을 달라고 하거나 먹을 것을 달라고 하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에게 누가 지나가는 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 손에 먹을 것이 주어지느냐 아니냐가 중요할 뿐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주인공은 달랐습니다. 비록 눈은 안보이지만 귀는 들립니다. 그의 귀에 들리는 소리는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대화입니다. 아마도 어떤 병든 자는 예수님에게 자신을 고쳐달라고 애원했을 것입니다. ‘이 맹인’에게도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분명히 고쳐주실 것이다’라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지금이 기회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꼭 만나고 싶다’는 간절함이 생긴 것입니다.

     

    ‘이 맹인’은 소리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눅 18:38) 그러자 그에게 들려오는 소리는 자신 앞에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는 소리입니다. 그렇지만 ‘이 맹인’은 물러나지 않고 더욱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눅 18:39)

     

    예수님은 그를 부르시고, 그의 소원을 물으십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눅 18:41) 예수님은 곧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십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지만 아주 긴박감이 느껴지는 이 사건 속에 담긴 복음은 무엇일까요? 그러면 이제 오늘의 본문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보길 원합니다.

     

    첫 번째로, ‘이 맹인’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꿈꾸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맹인이 맹인의 삶을 벗어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맹인'은 자신의 현재의 모습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맹인이 눈을 뜬다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질적인 변화를 경험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맹인이 눈을 뜬다’는 영적인 의미는 육의 사람이 영의 사람으로 변화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육의 사람이 영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땅에 속한 인생에서 하늘에 속한 삶으로의 완전한 변화를 의미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두 종류의 삶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땅에 속한 삶과 하늘에 속한 삶입니다.(골 3:1~2) 예수님이 지나가도 관심 없는 인생과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인생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영적인 맹인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자신들이 만들어 버립니다. 더 나은 삶,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꿈도 꾸지 못한 채 그날 벌어 그날 먹는 것으로 족한 인생들이 있습니다. 영적인 세계를 경험하지 못한 채 육적인 배를 채우는 것으로 스스로 위로하는 인생들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영적인 삶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더 좋은 길을 갈망하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31)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주십니다.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문은 열립니다.(눅 11:9)

     

    두 번째로, ‘이 맹인’은 한 가지 목표만 바라보고 소망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에게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맹인이 눈을 뜨는 일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불가능을 이룰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이 맹인’이 눈을 뜰 수 있었던 것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꿈꾸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불가능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에게나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여기에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어떤 대가입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한 분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목표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이 맹인’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 왔습니다.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이 맹인’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쳤습니다.

     

    위기의 순간, 기회의 순간 그 사람 입에서 나오는 말이 평소에 그 사람이 생각하는 말입니다. ‘이 맹인’에게는 예수님밖에는 없었습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예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진실로 믿는 자에게 불가능은 없습니다.’(막 9:23) 이것이 믿음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을 만나는 목표는 하루아침에 쉽게 이루어지지 않고, 고난 없이 쉽게 이루어지지도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맹인’이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쳤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앞서가는 자들의 방해였습니다. 그들은 보잘 것 없는 거지 맹인을 무시하며 꾸짖고 조용히 하라고 함부로 말했습니다.

     

    ‘앞서가는 자들’ 그들은 누구입니까? 그들도 예수님 만나겠다고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맹인’에게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는데 있어 장애물입니다. 그들이 ‘이 맹인’에게 한 말은 ‘잠잠하라’ 하며 경멸하듯 취급했습니다. 쉽게 말해 ‘떠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맹인인 주제에, 거지인 주제에...’

     

    우리 인생에서 신앙의 방해는 나와 상관없는 곳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나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과 사건 속에서 일어납니다. 그들도 입으로는 예수 믿는다고 하고, 말로는 교회 다닌다는 사람들입니다. 이 때 ‘이 맹인’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이 맹인’은 그 사람들과 대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과 논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내가 예수님을 만나야 하겠다고 하소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이 맹인’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군중은 영적 진보의 장애물일뿐입니다.

     

    믿음은 장애물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바라보아야 할 목표 예수님만 바라보고 나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나에게 닥친 문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문제에 집중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를 뚫어지게 쳐다보면 문제만 크게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뚫어지게 쳐다보면 문제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문제보다 더 크신 예수님이 만나주십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를 하소연 하지 말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십시오.(마 6:33) 수많은 사람 가운데 ‘이 맹인’의 목소리가 컸기 때문에 예수님이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작은 신음 소리라도 믿음의 호소를 들으십니다. 간절한 한 사람의 부르짖음을 구별하십니다. 수많은 군중 가운데 12년 동안 혈루병 앓는 여인의 손길을 구별하신 예수님이십니다.(눅 8:44)

     

    성도 여러분, 신앙 여정에 어떠한 장애물이 나와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좌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탄, 마귀의 방해와 유혹과 흐트러트림에 넘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어떠한 상황에서건 어떠한 장애물을 만나건 상관하지 말고 오직 예수 그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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