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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제나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교회력에 따른 본문 중심 설교 2014. 12. 7. 01:54

    대림절 둘째 주일(2014년 12월 7일)

    마태복음 25장 1-10절

     

    언제나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가. 성도는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1절).

     

    본문은 예수님께서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 비유를 통해 하나님을 믿는 자는 언제나 빛의 자녀답게 살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열 처녀는 신랑 맞을 준비를 하는 들러리들입니다. 여기서 들러리들이 손에 등불을 들고 있다는 표현은 성도의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들러리들이 등불을 들고 기다린다는 이야기를 하시며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자세가 이와 같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들려주셨습니다. 여기서 ‘들고’는 분사능동형으로 힘써서 계속 들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 비유의 방점이 여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시며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마5:16). 바울도 “너희가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권면했습니다(엡5:8). 이는 성도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어두운 세상에 구원의 길을 밝히며, 재림하시는 주님을 알리는 사명을 힘써서 계속 감당해야 합니다.

     

    나. 빛의 자녀는 형식주의 신앙생활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2-5절).

     

    본문에서 열 사람 모두 등불을 들고 있었지만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두 부류의 차이는 기름을 조금 더 준비하고 그렇지 못하고의 차이입니다. 여기서 ‘슬기로운’(프로니모이)은 ‘고삐를 매다’는 뜻에서 나온 말입니다. 마치 열 사람이 다 소를 몰았는데 다섯은 고삐를 매어 하루를 잘 마무리 했다면 나머지 다섯은 같이 몰았지만 마무리가 신중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외형상 열 명의 들러리들 모두 각자의 할 일은 다 했습니다. 모두가 등불을 들고 있었다는 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열 사람 모두 열심히 교회 다녔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동일한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치 이단 소리 듣지 않고 정통 교단에 속했다는 자부심으로 신앙생활 한 것과 같습니다.

     

    차이점은 슬기로운 다섯은 여분의 기름을 준비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에서 여분의 기름이란 신앙생활을 생기 있게 하는데 필요한 넉넉한 은혜를 상징합니다. 보통은 나름대로 은혜 받고 신앙생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은혜가 부족한 지도 모른 채 습관처럼 신앙생활 하면서 믿는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름이 부족한 모습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잘 드러나지 않는 이 작은 차이가 나중에는 큰 차이가 된다는 것이 심각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내가 주님의 이름을 불렀고, 선지자 노릇도 했고, 귀신도 내쫓았다”고 말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마7:22). 은혜가 부족하면 하나님의 뜻은 행하지 못하면서, 비본질적이고 형식주의적인 신앙생활만 하게 됩니다.

     

    다. 풍성한 은혜를 얻어야 계속해서 빛의 자녀답게 살 수 있습니다.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6-9절).

     

    이 비유는 예기치 못한 때에 신랑이 왔다는 데에서 이야기의 반전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다는 성도가 진짜였는지 가짜였는지는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으면 잘 모릅니다.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그 내면이 드러나고 인격이 드러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형식도 중요합니다. 성경 읽고, 기도하고, 전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신앙의 내용인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이 없으면 형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는 충만한 은혜를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여분의 기름은 영적인 성장을 위해 준비되어야 할 모자라지 않는 넉넉한 은혜를 말하기 때문에 성도가 항상 빛의 자녀로 살기 위해서는 부족함 없는 풍족한 은혜가 필요합니다. 물론 신앙생활의 형식도 은혜를 얻어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부족하면 신앙생활이 차츰 형식화 되어갑니다. 재림과 심판에 대한 의식이 사라집니다. 이 땅에 안주하게 되고 물질에 집착하게 됩니다.

     

    다섯 명의 들러리들은 신랑이 온다는 소리를 듣고 등불을 점검해 보니 그제서야 가지고 있는 기름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다섯 명에게 구해보았지만 그들은 나누어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는 은혜 문제는 각자가 책임지고 해결해야 할 몫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무한히 공급하십니다. 하지만 때를 따라 은혜를 구하는 일은 우리 스스로 해야할 일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날마다 풍성한 은혜를 공급받아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라. 언제 어디서나 빛의 자녀로 살 때 천국 잔치에 참여합니다.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10절).

     

    하나님의 시간에 천국의 문은 닫힙니다. 노아의 방주도 하나님이 그 문을 닫으셨습니다(창7:16). 주님은 언제 오실지 모르지만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두 사람이 같이 있어도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림 당하는 날이 오는 것입니다(마24:40). 따라서 깨어있는 성도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빛의 자녀로 살아야 합니다.

     

    지금은 대수롭게 안보이는 ‘적당히’와 ‘충분히’의 차이가 나중에는 하늘과 땅 만큼 큰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은혜 받기를 게을리 하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형식주의에 빠지게 되고 맙니다. 빛의 자녀는 은혜 받는 일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고후6:1). 하늘에서 내리는 은혜의 단비를 땅이 흡수해야 하듯이 내 영혼이 은혜 받기를 항상 힘써야 합니다(히6:7). 그렇게 하여 날마다 풍성한 은혜를 받으며 빛의 자녀로 살면 천국을 소유하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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