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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람을 살려라.
    교회력에 따른 본문 중심 설교 2008. 4. 13. 23:28


    부활절 넷째주일[20080413]


    사람을 살려라.(막 3:1-6)

     

    1. 기독교 신앙은 삶으로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동안 한국교회가 이것을 교리나 개념처럼 가르쳐 왔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삶의 변화와는 무관한 또 하나의 종교를 만들어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결과를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신앙 경험을 되돌아봐도, 그동안 교회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만 배웠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인지는 구체적으로 훈련받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추상적으로 밖에 머리 속에 남아있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비록 “하나님 사랑”을 배워왔다고 할지라도, 교회 중심적으로 생활하는 것이 곧 하나님 사랑의 방법 내지는 신자의 의무라고 배워온 한계가 있습니다. 즉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드리고,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고, 봉사하는 것이 “하나님 사랑의 삶”이라고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삶으로 나타나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것을 교회와 연관된 삶으로만 이해하였다면 분명 잘못 가르치고, 잘못 배워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고, 몸으로 익히라”는 말씀입니다. 몸으로 익히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연습하고, 훈련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딤전 4:7). 기독교는 교리를 아는 것, 개념을 이해하는 것으로 끝나는 종교가 아닙니다. 교회 중심, 주일 중심의 삶을 살고자 만든 종교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교리로 탄생한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시작되었습니다. 기독교적 삶은 말씀과 기도 훈련을 통해 이루어지는 영역 중심의 일상의 삶입니다.

     

    2.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사랑”을 어떻게 하면 되는 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가장 먼저 하나님을 아는 일이 중요합니다.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사랑을 느끼고 사귀고 싶어지면, 그 남자는 어떻게 합니까? 만나자고 하고, 만남이 이루어지면 그 후로는 만나는 시간을 자주 갖게 됩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을 왜 자주 만나길 원합니까? 이유가 없습니다. 좋아하니까 상대방에 대해 그냥 알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을 알고 싶어지는 마음이 들게 됩니다. 그런데 요한일서 4장 1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였음이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원래의 관계로 돌아왔다는 것이니, 우리가 무슨 특별한 일을 행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으로서 정상으로 돌아왔을 뿐입니다.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가 하나님 사랑에 응답하여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모습인데, 이런 사랑의 관계가 형성되기만 하면 사람에게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싶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호세아 6장 6절의 말씀에, “나는 ...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삶이 하나님의 뜻임은 분명합니다.

     

    3.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닮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아간다는 것인데, 그러면 이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을 안다는 것인데, 하나님의 속성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전능성, 전지성, 영원성과 편재성 등의 속성이고, 또 하나는 거룩, 사랑, 선하심 등의 속성입니다. 앞의 것들을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 뒤의 것들을 공유적 속성이라고 부름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부부는 닮아 보인다고 하지 않습니까? 물론 외모도 그럴 수 있겠지만, 부부가 닮는다는 의미는 성격도 비슷해지고, 마음도 서로 통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말은 하나님을 닮아간다”는 말입니다. 서로를 알아가다 보면, 서로 닮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4절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까 하나님의 속성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하였는데, 하나님의 전능성, 전지성, 영원성과 편재성 등의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은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본질인데, 이것은 인간과 차별되는 신적 essentia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닮는다고 할 때, 하나님만의 본질인, 하나님의 essentia를 닮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닮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공유하는 속성을 닮는다는 말입니다. 바로 후자로 말씀드린 하나님의 거룩, 사랑, 선하심이라는 하나님의 능력, 신적 energia를 닮는다는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알라. 하나님을 닮으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곧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우리도 거룩해야하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우리도 사랑의 존재가 되어야하고, 하나님이 선하시니 우리도 선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4. 선행이란?

    오늘 본문은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님의 선하심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니 우리도 선한 존재가 되고, 선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선행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본문을 통해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사역은 크게 세 가지로, 가르치시고, 전도하시고, 치유하시는 일이었습니다(마 4:23). 예수님은 이 날도 가르치시는 일을 목적으로 회당에 들어가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보면 어떤 특정한 시간과 공간의 상황 속에서, 비유로 말씀하시던지, 특정한 사람을 고치시던지, 아니면 기적을 일으키심으로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회당에 있던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하는 지 확인하기 위해 예수님의 행동을 엿보는 자들이 있었습니다(막 3:2). 이들은 예수님을 고소하려고 꼬투리를 찾고 있었던 완악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막 3:6). 그런데 마침 회당에 한쪽 손이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 규례에 따르면 안식일에는 생명이 위급한 사람 외에는 고치는 행위를 할 수 없습니다. 한쪽 손 마른 병은 생명이 위독한 병이 아니었기에, 만일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치료하면 예수님은 안식일을 범하는 상황이 됩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기다리고 있었으며, 죽이기를 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막 3:6).

     

    한편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을 불러서,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사람들의 중앙에 세우십니다. 그 다음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막 3:4) 예수님은 이미 바리새인들의 완악한 마음을 간파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과 아무 것도 행하지 않는 것의 표면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선행이란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그렇지 않은 악행은 생명을 죽이는 일이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인 선행의 의미를 분명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5. 사람을 살려야합니다.

    “선행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는 예수님의 메시지는 신앙을 율법으로 만들어버린 바리새인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완악한 바리새인들은 누구입니까? “안식일의 회당”은 "거룩한 시간, 거룩한 장소"라는 상황이 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주일 예배 시간에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일은 아랑 곳 하지 않고, 오히려 사탄의 도구가 되고, 사탄의 역할을 하는 자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거룩한 시간에 거룩한 장소에 버젓이 들어와 앉아 있으면서, 그들 주변에 있던 죽어가는 영혼은 방치한 채,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삶은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사람을 살리는 일에는 관심하지 않고, 죽이는 일만 관심한다면 삐뚤어지고, 완악한 마음을 가진 바리새인들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행입니다. 그러면 악행은 무엇입니까? 사람을 죽이는 악행은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 거짓증언, 비방입니다.”(마 15:19) “저 사람을 이용해서 내가 빼먹을 것은 없을까?, 저 사람이 없어져야 속이 시원할 텐데,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죽이고 내가 살까?” 이런 것들이 악한 생각이요, 비방이요, 악행입니다.

     

    그러면 “선행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내가 그 사람을 도울까?, 어떻게 하면 내가 그 사람을 위로해 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그 사람의 아픈 눈을 회복시킬 수 있을까?”하는 선한 생각으로 선행은 시작됩니다. 이런 선한 생각에서 봉사가 나오고, 섬김이 나오고, 전도가 나오고,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습관이 되고, 훈련이 되어야 선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 주 수요일, 신한은행 중화역지점에서 “서비스 마인드”에 대한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주 그 지점의 과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저는 직원이 몇 명이고 서비스 교육은 얼마나 받았는지 등을 간단히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직원은 15명이고, 서비스 교육은 신입 때 2박 3일 받았던 것이 전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 자신은 얼마나 교육을 받았던가”를 생각해보니, 제가 일했던 아시아나항공에서는 신입 때 3개월간을 서비스와 안전훈련 등을 교육받고, 계속해서 정기적으로 교육을 받았던 기억이 났습니다. 강의를 준비하며, 결국은 지속적으로 훈련되어 지고, 몸으로 익힌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신앙생활의 목표와 본질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고, 익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닮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선하심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선한 삶은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기도와 훈련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선한 삶을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선한 삶은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내가 하는 생각, 내가 하는 말, 내가 하는 행동이 사람을 살리는 일인지를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선한 생각과 말과 행동이 날마다 훈련되어지고, 몸으로 익혀지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사람을 살리고, 선한 열매를 풍성하게 맺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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