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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처가 별이 되는 은혜
    교회력에 따른 본문 중심 설교 2008. 10. 3. 00:37

    성령강림절 후 스무번째 주일[20090928]

     

    상처가 별이 되는 은혜(마 5:4)

     

    1. 인생의 사계절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애통하는 자,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슬픔보다는 기쁨이 더 좋은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패배보다는 승리, 이별보다는 사랑, 고난보다는 잘 나가고 돈 많이 벌기를 원한다. 그러나 실상 모든 인간의 삶 자체가 기쁨만 있고, 승리만 있고, 사랑만 있고, 잘 나가는 일만 있지 않다. 아무리 원해도, 아무리 그렇게 되기를 기도해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쁨만 있는 삶, 승리만 있는 삶, 사랑만 있는 삶, 승승장구하는 삶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왜 그런가?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이기 때문이다. “아니 하나님이 그럴 수가 있는가?”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인생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다 주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은혜라 말하면 이 땅에 태어난 것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큰 은혜이다. 이 땅에서 생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다. 이 땅에 태어나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고, 나를 창조한 하나님께 경배하며, 나 자신의 고유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 이것이 은혜인 것이다. 내 삶 속에 희노애락이 녹아있다. 희노애락을 뺀 삶은 없다.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잘못된 신앙관이다.

     

    예수 앞으로 나오면 구원받는다. 예수 믿고 참으로 구원받은 삶, 그것을 예수님의 산상설교에서는 제자 됨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복 있는 삶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복 있는 삶이라고 말씀하셨다. 또 예수님은 제자란 애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이 복 있는 삶이라는 것이다. 나에겐 슬픔도 비껴 가야하고, 이별도 없어야 하고, 고난도 없어야 하고, 오직 기쁨만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복 있는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잘못된 신앙이요, 위험한 신앙이다. 기복신앙이 그래서 위험하다.

     

    우리 인생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다 있다. 이 지구를 놓고 생각해 볼 때, 봄, 여름, 가을, 겨울은 하나의 지구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어떤 곳은 여름이지만 어떤 곳은 겨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다 주신다. 봄을 봄으로써 맞이하고, 여름을 여름으로 즐기고, 가을을 가을로써 누리며, 겨울을 겨울로써 존대하며 인내로 기다리는 것, 그러다 보면 따뜻한 봄이 다시 찾아오는 것 아닌가? 그러다 보면 어느새 훨씬 커있는 우리 자신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의 영적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 인생의 희노애락을 통해 어떨 땐 그것이 아픔이고, 슬픔이고, 힘든 일이지만 그 과정을 삶으로 부딪치며 통과한 사람에겐 영적 성숙이라는 선물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위로하신다. 시편 34:17-19: “의인이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들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하셨다. 애통하지 않는 사람을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신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하루가 낮만 있다면 태양밖에 볼 수 없지만 밤이 찾아오면 태양보다 더 큰 수많은 별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인생의 낮과 밤이 다 의미가 있는 것이다. 오늘 팔복의 두 번째 말씀은 “맨날 울어라, 맨날 슬퍼하라가 아니라 슬퍼할 때 슬퍼하라, 밤이 올 때 밤을 밤으로 존귀히 맞으라”는 뜻이다.

     

    밤에 불을 끄지 않고 밤을 거부하고, 맞이하지 않으려 하면, 밤의 깊은 의미를 알 수 없다. 밤을 밤으로 맞아들이면, 슬픔을 슬픔으로 받아들이면, 인생의 깊은 의미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 수 있게 된다. 인생에 밤이 찾아 온 사람이 있는가? 인생의 한복판에서 폭우를 맞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용기를 내고, 믿음으로 밤을 맞아야 한다. 용기와 믿음으로 폭풍우를 견뎌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용기는 주먹 쥐는 용기가 아니다. 원수 갚겠다는 비통함은 자신도 죽이고 남도 죽인다. 우울증을 가져오고, 한을 품게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용기는 밤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밤을 대면하는 용기, 영적인 용기, 내면적 존재의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밤을 넘어설 수 있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영적 깨달음과 함께 하늘의 위로를 경험하게 된다.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용기 있는 애통은 사람을 살리는 힘이 된다. 내 인생에 밤이 왔다고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니다. 인생의 밤에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는 자가 있고, 그렇지 못한 자가 있다. 우리가 살다보면 인생의 밤이 올 수도 있고, 비바람이 강하게 몰아칠 때도 있다. 그때 내 주변의 환경을 보지 마라. 내 인생의 조건을 보지 마라. 살아계신 하나님만 바라보아라.

     

    2. 애통, 성숙을 위한 과정

    슬픔, 애통이란 뼈속까지 아픈, 창자를 끊는듯한 고통을 말한다. 이러한 일은 보통 세 가지 경우에 찾아온다. 1)고난을 겪고, 실패하고 짓밟힌 이가 겪는 고통이다. 이런 고통에는 시간이 갈수록 괴로움이 더하고, 울분이 쏟아 오른다. 심지어 육신과 마음에 병까지 들게 만든다. 2)사랑이 끊기는 이별의 아픔이다. 생이별이든 사별의 아픔이든 이런 것은 잠을 못이루게 하고, 견디기 힘들게 하고, 이 또한 우리를 병들게 한다. 3)지금까지 죄가 누덩이처럼 보일 때 느끼는 비통함이다. 그동안 자신의 죄를 죄로 느끼지 못하고 살다가 어느 날 그것이 자신 만행과 교만, 짐승같은 짓임을 깨달았을 때 느끼는 영적인 애통이다. 존재의 슬픔이다.

     

    이런 고통을 겪어보지 않고 성인이 된 사람이 어디있는가? 어른이 되면서 이런 슬픔 가운데 하나라도 겪어보지 않고 자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 겪는 일이다. 이런 슬픔을 대면할 때 믿음과 용기로 이겨나가는 자만이 더 큰 존재로 성숙하는 것이다.

     

    3. 우리는 무엇을 애통해야 하는가?

    1) 나의 죄로 인해 애통해야 한다.

    우리는 내 자신의 죄를 보고 통회 자복하는 애통함이 있어야 한다. 약 4:9-10: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내 안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애통해야 한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 7:18) 참된 회개의 애통은 용서와 구원의 위로가 임한다.

    2) 이웃의 죄와 허물, 시대의 아픔,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애통할 수 있어야 한다.

    어려움에 처한 이웃, 굶어 죽어가는 동포, 예수 없이 죽어가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보고 애통해야 한다. 이웃의 죄와 허물을 보고 함께 울어야 한다. 우리 이웃을 위한 눈물, 그것이 사랑이요, 전도요, 선교이다. 그 눈물이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킨다. 죄를 지은 한 여인은(눅 7:37)은 예수님 뒤에서 향유 옥합을 깨뜨리며 예수님의 죽으심을 애통해했다. 우리는 오늘날 가정이 쪼개어지고, 공동체의 사랑 없음, 교회의 하나되지 못함이 우리가 애통할 일이다.

     

    4. 십자가, 상처가 별이 되는 은혜

    갈보리 언덕에 십자가가 세워졌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애통해 하였는가? 하늘의 슬픔이 있었다. 죄악 가운데 있는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 아들을 희생해야만 하신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슬펐겠는가? 또한 십자가에서 아들의 죽음의 고통과 죽음을 어머니 마리아의 아픔은 어떠했겠는가? 남편이 죽는 아픔보다 더 큰 자식의 죽음 아니겠는가? 또한 제자들도 스승을 잃은 절망감으로 애통했을 것이다. 슬픔은 나만 겪는 것이 아니고 모두 겪는 일이다. 이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더 큰 영성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게 된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후 1:3-5)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십자가가 온 인류에게 구원의 은혜가 되는 위로와 소망이 되었다. 애통하는 자가 있는가? 우리의 믿음, 소망, 사랑이 되시는 예수님께 나아가라. 그분께서 우리 눈의 눈물을 닦아주시며, 마음의 병을 위로하실 것이다. 그분이 우리의 깊은 상처를 소생하는 별로 변화시키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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