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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교회력에 따른 본문 중심 설교 2011. 1. 1. 15:35

    송구영신예배[20101231]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막 2:18-22)

     

    2010년도 송구영신 예배에 나오신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올 한 해를 돌이켜보면 정말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습니다. 스포츠 분야에서 연초부터 국민들에게 많은 기쁨과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천안함과 연평도를 공격한 북한의 위협으로 우리는 불안했었습니다.

     

    연말에 무엇보다 가슴 아프고 부끄러운 현실은 감리교단이 권력 다툼 끝에 결국은 모든 감리교인이 치욕을 겪게 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판국에 교단 자유게시판에는 비난 공방의 글과 제자세미나니 영성훈련이니 하는 어울리지 않는 글들이 올라오고 있으니 아직도 목회자들이 가장 정신 차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홈페이지 문 닫고 자숙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으며 먼저 우리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을 잘 살고 있는가?’ 생명은 살라는 명령인데, 우리는 정말 잘 살고 있는 것입니까? 잘 먹는 것이 웰빙이 아니라 잘 사는 것이 웰빙입니다. 이를 성경적으로 말한다면 ‘나는 복음으로 변화되고, 그리스도의 분량으로 성장하고 있는가?’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셨을 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여정, 하나님은 아브람을 그 길로 초대하시지만 인간적으로 볼 때는 쉬운 결단의 길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환경의 변화에 대한 도전이고, 포기해야 할 것들이 있고, 버려야 할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이 믿음으로 그 길을 갔더니 삶의 변화를 경험하고, 부를 얻고, 자녀를 얻는 복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새해에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며, 살라는 명령을 잘 실천해 나갈 수 있게 되길 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보이는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원래 금식은 이스라엘의 대속죄일에 한번 하도록 하는 규례가 있었으나 바벨론 포로기 이후 금식 횟수가 마치 종교적 경건성의 기준인양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 당시에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는 바리새파 사람들도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은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여기서 혼인 잔치란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때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신랑을 빼앗길 때 그 때 금식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제자들에게도 귀띔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바로 자신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을 예고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혼인 잔치는 복음이 드러나는 곳이라는 비유입니다. 즉 복음이 살아있는 곳에는 금식이 아니라 축제가 일어나야 마땅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비유 설교가 이어집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다. ...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다.” 여기서 새 옷과 새 포도주는 예수님을 통한 복음을 말합니다. 새 포도주를 새 가죽 부대에 넣듯이 복음의 삶은 복음의 옷을 입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보여주는 형식적인 신앙은 낡은 옷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신앙의 본질은 사라지고, 유대교의 전통과 사람들이 만든 규례로 종교적 껍데기만 남은 그들의 위선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 시간 우리의 신앙을 반추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금식에 대한 설교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형식적 종교 생활을 지적하며 복음의 본질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모습에 경종을 울리고 계십니다.

     

    여러분, 무엇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까? 사람은 가르친다고 변하는 것이 아니고, 훈련시킨다고 변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복음의 사건이 경험되어야만 사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복음 안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로만 사람이 감동받고 변화될 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복음은 어떠했습니까? 바리새인들은 병자와 세리, 창녀들을 죄인 취급하며 공동체에서 소외시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포용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조문을 중요시 했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율법의 의미를 되살리셨습니다.

     

    새 포도주가 새 부대에 담기듯이 예수님의 복음이 들어가면 반드시 변화된 삶의 옷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믿는 자에게 구원의 능력이 됩니다.

     

    여전히 과거의 악습에 매였고, 복음의 진리를 왜곡시키는 가치관으로는 비록 종교의 형식은 취할 수 있을지 모르나 변화는 결코 경험할 수 없습니다. 붕어빵 틀에서 국화빵 모양이 결코 나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의 감리교의 모습도 다를 바 없습니다. 복음의 본질이 회복되고, 복음의 삶을 살지 않는 한, 감리교는 일 년 예산 수백억을 집행하는 사업체일 뿐입니다. 오늘의 감리교의 죄악상은 2천 년 전 바리새인들이 던졌던 금식 논쟁과 대동소이합니다. 우리 모두가 복음의 삶은 잃어버린 채 자기 의만 드러내는 바리새인이 되어가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단 이것은 한두 사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본질이 새로워지면 겉모습은 자연히 아름다워 질 것입니다. 복음이 회복되면 미국의 세이비어교회 같은 교회들이 많이 나오고, 그런 교단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려 오셨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다시 한 번 예수님의 피 묻은 복음을 경험하며, 예수님의 뜻을 따라 나아갈 수 있게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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