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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데반의 믿음을 주소서.
    교회력에 따른 본문 중심 설교 2011. 5. 27. 11:16

    부활절 다섯 째 주일/웨슬리 회심 기념 주일[20110522]

    스데반의 믿음을 주소서.(행 7:54-60)


    천국이란 과연 무엇일까? 한 주간 천국을 묵상하며, 천국은 하나님의 품과 같다는 의미를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지하철을 타고 가다 자신의 옆 자리에 담배 냄새에 찌든 사람이 앉으면 그 자리를 피하려 할 것입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몇 번 있습니다. 이번 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품에 안긴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그러면 천국은 누가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반갑게 포옹하실 수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 품에 안길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죄의 냄새가 지독하게 밴 사람을 하나님이 두 팔 벌여 맞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아기처럼 엄마만 바라보는 눈빛으로 하나님만 바라보는 사랑의 향내 나는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 반기시겠습니까? 천국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만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스데반의 순교 이야기입니다. 스데반은 최후의 순간 천국이 열리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천국에서는 주님께서 일어서서 반기시고 계셨습니다. 오늘 이 아침 스데반의 순교 사건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보길 원합니다.

    스데반은 지금 재판을 받는 재판석에 서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 11절을 보면,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라는 거짓 증언으로 공회에 잡혀온 것입니다. 붙잡히고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증언하는 것을 봅니다.

    공회에 앉은 사람들과 대제사장 앞에서 스데반이 설교하는 내용이 오늘 본문에 앞 선 7장의 내용입니다. 설교를 듣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마음이 찔렸지만, 이를 갈았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분노한 것은 자신들의 죄가 다 들어났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7장 51절을 보면, 공회에 앉은 유대 지도층들에게 목이 곧은 백성, 마음과 귀에 할례 받지 못한 사람들,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 자들, 선지자들과 의인을 잡아 죽인 자들, 율법을 듣고도 행하지 않은 자들이라고 지적합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그들의 반응은 회개한 것이 아니라 분노했습니다. 죄를 지적하면 두 가지 반응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회개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는 사실 너희들이 죽인 것이다.” 이 설교를 듣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베드로에게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상황은 달랐습니다. 전하는 대상도 달랐습니다. 진리를 전하지 않으면 죽을 일도 없는 상황입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론 진리를 전하지 않으면 내 몸 하나 편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은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의 상황이 어떻습니까? 종교의 형식만 남은 유대인들에게 진리를 전한다는 것은 순교를 각오하는 일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떠한 때에 어떠한 일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부르신 것입니까? 이것을 깨닫는 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내가 죽느냐 사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내가 지금 하는 일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인가입니다. 마태복음 10장 28절,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주님이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런 뜻입니다.

    계속해서 본문 55절을 보면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였다고 말합니다. 성령님의 능력이 이 사건, 이 역사의 현장 속에 함께 하시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역사 속 삼위의 현장에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성령 충만한 베드로는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 지를 행위를 통해, 사건을 통해 직접 보여주신 말씀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우리가 무엇을 보느냐, 무엇을 하느냐가 곧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결정합니다. 내가 늘 기도하면 기도의 사람입니다. 내가 늘 악을 도모하면 마귀의 종일뿐입니다. 골로새서 3장 1, 2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스데반은 하늘을 보며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스데반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했고,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우리는 인생의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고전 10:31)라고 늘 말합니다. 분명한 것은 그렇게 살면 하나님을 영광을 반드시 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쉬지 않으십니다. 주무시지도 않으십니다(시 121:4). 스데반은 본 그대로를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은 침묵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의 반응은 분노와 잔인함으로 돌을 던집니다. 증인이 먼저 돌로 치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 가운데서 저자 누가는 의미 있는 말씀을 하나 삽입합니다. 바로 사울이라는 청년의 목격입니다. 물론 사울은 그때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으로 보이는 예수 추종자인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겼습니다.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당연히 여겼지만 스데반이 죽을 때 그의 표정과 그의 말은 결코 이후 사울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음은 분명합니다. 죽는 순간까지 피 흘리면서 인간으로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스데반의 이 기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마지막 기도이기도 합니다(눅 23:46).

    누구든지 죽는 순간에 하는 말은 진실입니다. 불신자는 죽는 순간, "나 지옥 간다"고 말하든지 그렇게 느낍니다. 살아있는 동안은 거짓이 많지만 죽는 순간은 거짓말 못합니다. 피투성이 스데반이 하는 말, 그것은 죽음을 승리로 바꾸는 천국을 경험한 자의 언어였습니다.

    스데반의 위대한 마지막 기도는 자신을 죽이는 그들을 위해서 하는 중보기도입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것 또한 예수님의 기도였습니다(눅 23:34). 예수의 영이 스데반에게 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이 항상 있으면 우리도 예수가 됩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사울의 회심을 위한 사건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웨슬리 회심 273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이기도 합니다. 회심은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웨슬리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진리에 대한 고민과 구원받는 믿음에 대한 진지한 추구가 회심의 은혜를 체험하게 하는 계기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구원이란 죽음의 공포, 두려움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입니다. 구원의 확신 속에 있던 믿음의 선진들은 순교를 기쁘게 맞이했습니다(히 11:35-38). 누가는 스데반은 죽은 것이 아니고 잔다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이 본문이 우리에게 믿음의 도전을 주고자 하는 누가의 증언인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 죽음이란 없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죽음은 모든 죄인을 정복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예수를 따르는 자 만큼은 정복하지 못합니다. 잠자는 사람은 반드시 다시 깨어납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품과 같습니다. 스데반은 살아서 하늘 아버지의 품을 바라보고, 잠들어 하나님 품에 안깁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사울의 회심을 위한 씨앗이기도 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의 밀알이 수많은 기독교 신앙의 열매를 맺었습니다(요 12:24). 우리도 하나님의 영광만을 바라보는 스데반의 믿음을 소유하길 원합니다. 주님, 우리에게도 스데반의 믿음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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