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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시다.
    교회력에 따른 본문 중심 설교 2011. 10. 11. 17:25


    성령강림절 후 열여섯째 주일[20111002]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시다.
    (창 4:1-5)


    창세기 3장의 마지막 부분과 4장의 처음 부분을 보면 눈에 띄는 차이 하나가 나타납니다. 바로 등장인물들의 무대가 달라진 것입니다. 창세기 3장의 배경은 에덴동산이라는 장소이고, 4장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에덴 동편 어딘가 살면서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단순히 장소만 다른 것이 아닙니다. 두 이야기 안에 담긴 영적인 배경을 살펴보면 그 안에 엄청난 메시지를 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뱀의 유혹에 넘어가 그만 먹고 만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 하셨는데,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죽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대신 하나님은 뱀과 아담과 하와에게 저주하는 대목이 나옵니다.(창 3:14-19)


    그러면 창세기 3장이 우리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아담과 하와의 영적 생명이 끊어졌다는 것일까요? 아담은 선악과를 먹기 전에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분명 범죄 후에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도대체 선악과를 따먹고 무엇이 달라진 것입니까? 창세기 4장과 비교하여 보면 그 차이가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창세기 4장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의 처음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에덴 밖에서 그들이 과연 무엇을 하였는가를 말하고 있는지에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4장 1절과 2절 안에 많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가인과 아벨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두 아들은 일 할 나이로 성장하였습니다. 우리는 두 아들이 무엇을 했는지를 통해 그들의 일상을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창 4:2)


    하지만 창세기의 저자가 정말 말하고 싶은 내용은 3절 이하입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과 아벨은 부모로부터 에덴동산과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에게도, 가인과 아벨에게도 이제 더 이상 그 하나님의 음성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들이 일하고 먹고 살다가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자 하나님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으니 드디어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벨과 그의 제사는 하나님이 받으셨는데,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라고 밝힙니다.(창 4:3-5) 그리고 분노한 가인에 의해 비극이 일어납니다. 물론 살인 사건에 대해서도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지만 오늘 우리가 주목해 보고자 하는 것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처음 인류에게 하나님의 음성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며, 이제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는 아담의 후손입니다. 에덴에서 쫓겨나 이 땅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근본 그 뿌리인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배부르게 먹고, 편하게 산다고 해도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지만 아니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더욱더 아담은 에덴에서 살았던 삶을 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돌아갈 수만 있다면 다시 돌아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담의 자손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성경은 창세기 서두부터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 곳곳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인생의 본분인 예배의 삶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스라엘 자손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시고자 하는 이유를 말씀하실 때도 그들이 예배하는 백성이 되어야 함을 언급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 3:12)


    여호수아가 세겜에 모인 백성들에게 간절히 외치는 말씀은 하나님께만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4-15)


    다니엘의 세 친구는 하나님과 목숨을 바꾸지 아니하고 왕에게 담대히 말합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7-18)


    우리는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의 후손들이지만 하나님이 완전히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놀라운 사실을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담을 내쫓으신 하나님이시지만 그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생각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가 다시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대하고 계십니다. 그 길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라는 영적 깨달음을 우리에게 전해 주셨습니다.(요 4:23) 예수님은 아버지 품을 떠난 둘째 아들의 비유를 통해 집 떠난 아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십니다.(눅 15:11-24)


    오늘 본문 특별히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묵상하며 깨달은 두 가지의 영적인 메시지를 이 시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본문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있고,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4장 4절과 5절을 보면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지만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차이를 믿음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히 11:4) 우리는 믿음으로 예배드린 것과 형식으로 예배드린 것이 그렇게 큰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있고,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있다는 것을 통해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가 있고, 듣지 않으시는 기도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영적 도전을 줍니다. 믿음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인정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는가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진정으로 느끼고 있는가 전혀 모르고 있는가의 차이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경고합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그렇습니다. 예배드린다는 것 그것은 예배의 형식에 참여했다가 아닙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찾는 인간의 가장 가치있는 행위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우리의 삶 그 자체가 예배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만 받으신 것이 아니라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벨”을 받으셨다는 말씀은 삶이 곧 예배이고, 예배가 곧 삶이라는 뜻입니다. 예배의 삶을 살지 못하면서 한 시간 예배에 참여하는 것으로 예배 드렸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제물만 드린 것으로도 예배 드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삶을 비판했습니다. 외식이란 문자적으로는 겉과 속이 다른 것을 말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외식이란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삶을 말합니다. 곧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은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며 구제했습니다.(마 6:2) 그들은 회당과 큰 거리에 서서 사람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도록 하며 기도했습니다.(마 6:5) 그들은 경건의 모습을 드러내려고 금식하고 있다는 티를 많이 냈습니다.(마 6:16)


    하나님께서 그런 구제를 칭찬하시겠습니까? 그런 기도를 들으시겠습니까? 그런 금식을 기뻐하시겠습니까? 야고보는 경건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말할 때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 하였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금식이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계속해서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사 58:6-7)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롬 12:1) 삶이 곧 예배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예배의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을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그러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의 후손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그 비밀을 알려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2장 4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한 말 한 마디도 마음대로 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하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요 12:50)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우리도 예수님처럼 기록된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행하고, 하나님이 친히 주시는 음성을 듣고 행하는 삶, 곧 영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육은 비록 이 땅에 있지만 영은 천상의 에덴과 맞닿아 있는 신인합일의 실제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삶, 우리 몸과 제물을 함께 드리는 예배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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