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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교회력에 따른 본문 중심 설교 2009. 4. 21. 17:00

    부활절 제2주[20090419]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요 4:23-24)

     

    1. 십자가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이유는 우리 인간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온갖 악행만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행여나 머릿속으로 하나님이 계심을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행위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고,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육체의 정욕대로 사는 인생이었습니다.

     

    순전히 우리 인간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으니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슨 선한 생각과 선한 행위가 있어서 베푸신 사랑이 아닙니다. 불쌍한 우리 인생을 진정한 행복의 길로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지막이자 완전한 사랑을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마지막이라 함은 십자가 외에는 다른 구원의 길이 없음을 말하며, 완전한 사랑이라 함은 십자가의 길 하나만으로도 구원이 완전하고도 충분히 이루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 외인이었고, 소망도 없었고, 마음에 하나님도 없는 그런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사이인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하시기 위해 십자가 앞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 2:14-16)

     

    하나님 앞에 갈수도 없는 우리 모두를 예수님을 통해 갈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19-20)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누구나 나올 수 있고, 누구나 예배드릴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은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보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에게나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올 수 있는 특권을 주신 것이 은혜 중에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은혜를 주실 때 감사함으로 받는 자가 복 있는 사람입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2. 예배의 본질은 진리 안에서 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을 오해해서 우리가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구원을 받고, 진리를 얻는다고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이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길을 우주적 지평 속으로 열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선택받은 사람만이라는 장벽을 헐고 우주적 구속(universal redemption)의 사건으로 그 지평을 열어 놓으셨다는 말씀입니다.

     

    누구나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다는 말은 누구나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며, 누구나 성령님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께 진정으로 예배 드릴 수 있다는 말씀이 됩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하신 말씀이 그 의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심각한 문제는 누구나 예배를 드릴 수 있으나 하나님은 아무 예배나 받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누구나 교회에 나올 수는 있지만 실제로 예배드리는 사람이 되는 것은 다른 일이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배가 무엇인지 오해하는 일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배의 본질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예식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엿새 동안 창조 사역을 하시고 일곱째 날 안식하셨다하여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예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배의 본질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예배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예배의 본질적인 요소는 성령님과 진리입니다. 예배는 진리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말씀하시는 시간이고, 그것을 통하여 우리가 진리를 깨달아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오늘 말씀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하였습니다. 먼저 우리가 진리 안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의미는 먼저 우리의 지성적인 부분이 하나님 앞에 헌신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우리의 전인적인 요소가 하나님 앞에 헌신된다고 말하는 것이 더 분명한 말이지만 그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 우리의 지성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드립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라고 했습니까? “온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는 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귀를 닫고 마음을 닫는 사람에게는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여기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라”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 기도하는 마음, 사랑의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야 함을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간절히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배드려야하는 것입니다. 잠언 8장 17절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하신 말씀이 이 의미입니다.


    두 번째로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말씀은 우리 몸으로 예배드리라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졸리는 눈, 흐트러진 자세가 아니라 초롱초롱한 눈으로 거룩한 자세로 말씀을 받아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말씀은 무엇보다 우리에게 지적인 열심을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정성을 쏟는다는 말은 이러한 지성적인 헌신을 바쳐 예배드리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를 드리는 사람의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아무리 진리가 선포되어도, 게으른 지성, 집중하지 않는 마음의 상태, 순종을 거부하는 마음의 자세,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려는 마음이 없는 그 마음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오직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일 때 영혼에 진리의 햇빛이 비추는 것입니다.

     

    3. 예배의 본질은 성령님 안에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창조 목적을 따라 살아가게끔 은혜를 통해서 진리의 밝은 빛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 서 있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의의 길, 구원의 길, 천국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진리 안에 있다고 주장해도 그 영혼에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많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날마다 모여 열심히 부르짖는다 해도, 그런 사람들이 보여주는 삶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복적이고 지극히 인간적인 열심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예배는 결국 영혼의 변화가 일어나고 삶의 열매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변화가 없다면 그 사람이 아무리 열심히 예배를 드리고, 본인은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렸다고 생각해도 실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예배란 진리와 더불어 성령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작용으로 우리 영혼에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길 기도할 때, 그것이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사모하는 은혜가 아니고, 세상에 자랑하기 위해 구하는 은혜도 아닌, 오직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위한 내 인생의 좌표조정을 구하는 은혜여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인생에는 변화가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내가 필요할 때만 찾는 도구로 만들어버린 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그래서 형식적인 예배, 형식적인 기도, 형식적인 대화 방식에 자신도 모르게 길들여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자본주의 논리 속에 깊숙이 체질화된 오늘날의 신학교와 교단이 이런 목회자를 양산했는 지 모르겠습니다. 삶은 없고, 예배 시간만 존재하는 오늘의 교회와 교인들이 되버렸는 지 모를 일입니다.

     

    예배학 책을 보면 예배의 구성 요소를 기도, 찬송, 설교 등등으로 말합니다. 아닙니다. 예배는 그런 것들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와 찬송과 설교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하나님 임재를 위한 은혜의 수단일 뿐입니다. 예배의 본질적인 구성 요소는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성령님의 충만함입니다. 그리고 진리를 구하는 내 믿음, 나의 간절함, 지적인 집중이 필수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언제 만납니까? 성령님과 진리 안에서 만납니다.

     

    따라서 기도만 드려도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찬양만 드려도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님의 임재 안에 있는 나의 진정함입니다.

     

    김석년 목사님의 국민일보 로뎀나무 란의 기고 글 가운데 이런 내용이 내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하늘에 계신 이라고 하지 말라. 세상 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 라고 하지 말라. 너 혼자만 생각하고 살아가면서. 아버지 라고 하지 말라. 아들딸로 살지 않으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라고 하지 말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라고 하지 말라. 물질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을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라고 하지 말라.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오늘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하지 말라. 가난한 이들을 본체만체하면서.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달라고 하지 말라. 누구에겐가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말라고 하지 말라. 죄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다만 악에서 구해 달라고 하지 말라. 악을 보고도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아멘 하지 말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드리지 않으면서.”

     

    삶의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 기도, 찬양, 설교... 이런 것들을 하면서 우리는 예배를 드렸다고 착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예배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이 나를 움직입니다. 그 때 들리는 진리의 말씀은 천둥소리보다 커서 나를 전율케 만듭니다. 그 때 울리는 찬송 소리는 폭포수보다 장엄하여 내 심장을 떨리게 합니다. 그 때 드리는 내 기도는 영혼을 변화시키고, 생명을 움직이게 하는 창조의 언어가 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만나길 원합니다. 성령님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자로 살아가길 원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 없이는 결코 살 수 없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실로 하나님께 매달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구하는 자에게, 간절히 찾는 심령에게 반드시 일어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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