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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수님의 권위
    교회력에 따른 본문 중심 설교 2012. 1. 29. 10:51


    주현절 후 넷째 주일[20120129]

    예수님의 권위(막 1:21-2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와 회복 그리고 온전케 하시는 은혜가 말씀을 듣는 심령마다 충만하게 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율법을 가르치는 행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 마다 예수님의 사역에 관한 증언에서 사건의 순서나 그 사건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강조점에 차이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경우 본문의 사건은 예수님 공생애에 처음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회당에는 회당장이 있었고, 회당의 가장 큰 기능은 모세의 율법을 가르치는 데에 있었습니다. 회당에는 ‘모세의 자리’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서기관들과 랍비들은 ‘모세의 권위’를 가지고 모세의 율법과 구전법을 가르쳤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여호수아와 장로들과 예언자들을 통해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전해 내려왔습니다. 그들은 전승의 수호자들이며 모세의 율법을 연구하고, 해석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율법인 ‘할라카’를 만들 수 있었고, 옳고 그름을 판결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습니다.(신 17:11)

    먼저 본문의 정황을 생각해 봅니다.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문맥상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 일행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에서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제자로 부르셨고, 그들과 함께 가버나움이라는 큰 마을로 들어갑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니까 아마도 회당장이 제자 가운데 한 사람에게 물어보았을 것입니다. ‘저 분이 누구신가요?’ ‘우리를 가르치시는 랍비이십니다.’ 회당장은 예수님께 율법을 가르쳐 주시기를 부탁했을 것입니다. 물론 여기까지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때 무엇을 가르치셨는지에 대해서는 본문에 언급이 없기 때문에 알 길이 없습니다. 가르치신 내용은 알기 어렵지만 22절에는 회당에 있던 사람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회당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엑제플레손토’ 곧 매우 놀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서기관과는 차원이 다른 영적인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실 때에 나타난 권위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서기관들에게도 권위가 있었고, 율법을 해석하는 권한도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권위는 전통으로 내려오는 모세의 권위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당시 가장 영향력이 큰 랍비 힐렐과 랍비 샴마이의 권위로 율법을 해석했습니다. 다시 말해 서기관이 ‘모세의 자리’에서 율법을 교육하면서 ‘랍비 힐렐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는 ‘랍비 샴마이는 이렇게 가르치십니다.’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의 권위를 인용해 해석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다른 복음서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방식은 이렇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자는 재판을 받게 된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형제에게 분노하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고, 지옥 불 속에 던져질 것입니다.”(마 5:21-22)

    “모세의 율법에 ‘간음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이미 마음으로 간음한 것입니다.”(마 5:28) “여러분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율법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앙갚음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마 5:38)

    예수님은 다른 사람의 권위를 인용해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위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권위는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권위 ‘엑수시아’는 ‘존재로부터’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기 안에 있는 것이 드러날 때 그것이 곧 그 사람의 권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예수님이 빌립에게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10)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빌 2:6) 곧 “하나님의 형상”이시라고 말씀합니다.(고후 4:4)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안에 하나님의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교훈을 들은 사람들은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놀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서기관도 율법을 가르치고, 예수님도 율법을 가르쳤는데 서기관이 가르칠 때에는 아무런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다가, 예수님이 가르치실 때에는 귀신 들린 사람이 소리 지르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21절에 예수님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일과 23절에 더러운 귀신 들린 자가 소리를 지르는 일은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는 가운데 일어난 거의 동시적인 사건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서기관이 가르치는 내용과 예수님이 가르치는 내용에 무슨 큰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까? 그들이 다른 사람의 권위로 율법을 해석하였다고 해서 그들의 해석과 예수님의 해석이 크게 다른 해석입니까?

    이 점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3장의 말씀이 여기에 힌트를 줍니다.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니라.”(마 23:1-3)

    예수님께서 무엇을 지적하신 것입니까? 율법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근본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롬 7:12)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문제는 율법을 가르치고 전하는 자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통해 하나님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가르치는 권위를 통해 하나님을 일종의 보호막, 안전장치로 악용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라는 이름으로 사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변호사가 약자를 보호하지 못하고 돈 주는 편을 위해 불법을 피해가도록 하는 것도 같은 행태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지도자가 “마음이 썩고 진리를 잃어버리면 종교를 한낱 이득의 수단으로”(딤전 6:5, 공동번역) 변질시킨다고 경고합니다.

    종교 생활의 근본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있습니다. 계명과 율법도 하나님을 알라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말하기를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종교는 일종의 형식주의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롬 12:2)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마음을 담고 있는 모든 율법의 핵심이 결국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는 한 말씀으로 집약된다고 밝힙니다. 즉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친다고 하면서 율법대로 행함이 없는 것은 가증한 일입니다.(딛 1:16)

    예수님이 경계하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가르치는 행위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외식은 율법의 근본을 모른 채 자신들의 사욕으로 바꾸어놓은 하나님 상을 ‘모세의 권위’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는 행위입니다. 그것을 마태복음 23장 4절 이하에서 말씀합니다. 그들은 율법으로 올바른 하나님 상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전통과 윤리를 가르치고(마 23:4), 구원의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입니다.(마 23:5-7)

    하나님을 모르고 진리에서 떠난 사람들이 아무리 유명한 사람의 권위로 거룩한 날, 거룩한 장소에서 가르친다고 해도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가 아닙니다. 사람이 변하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거룩한 날, 거룩한 장소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이것이 모순 중의 모순입니다.

    심리학적으로 귀신 들리는 단계를 일곱 단계로 말하기도 하지만 성경은 크게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1편 1절에 보면 처음에는 “악인들의 꾀를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의 유혹 단계입니다. 우리는 이 단계에서 넘어가지 않도록 깨어있어야 하고(벧전 5:8), 마귀에게 틈을 주어서는 안됩니다.(엡 4:27)

    마귀가 쓰는 속임수가 ‘딱 한 번만’입니다. 딱 한번만이 두 번 되고 세 번이 됩니다. 이것이 귀신이 침투하는 다음 단계입니다. “죄인들의 길에 서는” 단계입니다. 이미 죄로 틈을 주었기 때문에 열어놓은 그 문으로 귀신들이 들어와 서서히 자리 잡고 똬리를 트는 것입니다.

    사탄과 그 졸개들은 영적 악한 실체입니다. 죄로 틈을 보인 사람의 몸에 침투해 자기들의 집으로 삼습니다.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마 12:43-44)고 말합니다. 마귀들은 자기가 들어간 사람의 육체를 자신의 소유로 거짓 주장을 합니다.

    이 단계가 심해지면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눌러 앉아” 아예 사는 단계가 됩니다. 마귀는 그 사람에 대한 점유 기간이 길수록 그 사람을 완전히 소유하고 통제하여 마치 자신이 그 사람의 육체에 대한 권리가 있는 양 주장합니다.

    본문에 귀신 들린 사람은 세 번째 마지막 단계로 오랜 동안 귀신의 지배하에 제압당하여 죄의 노예 상태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빛과 어둠이 공존할 수 없는 법, 빛이 드러나자 어둠은 괴로워합니다. 귀신 들린 자는 소리 질러 “나사렛 예수여, 왜 우리를 간섭하려 하십니까?(새번역)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사탄은 자신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 줄 알고 있습니다.(요일 3:8) 그래서 여러 가지 간계로(엡 6:11) 사람들을 속이고,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도록 마음을 혼미하게 합니다.(고후 4:4) 진리를 믿지 못하도록 마음을 방해 합니다.(요 8:44) 사탄의 최종 목적은 인간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짓말하고(요 8:44), 속이고(딤전 4:1), 빼앗고(요 10:10), 가짜 하나님 상에 집착하게 만들고(마 25:24), 인간성을 완전히 파괴하여(막 5:5), 결국 파멸하게 만듭니다.(요 10:10)

    경건한 장소에서 경건한 옷을 입고, 경건한 말을 한다고 해도 그가 전하는 하나님이 실제의 하나님과 일치하지 않으면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하나님의 진리를 전할 때에만 귀신이 떠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온전한 인간성이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본문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선포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지 않으면 귀신은 더욱 강퍅한 마음과 교만과 폭력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왜곡시키고, 가르치는 자를 비웃고, 자신의 수하에 있는 사람을 파멸로 몰아갑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냈습니다. 예수님이 곧 진리이시고 예수님이 인격적 관계를 맺는 아버지를 드러내니까 귀신은 두려워 먼저 소리 지르다가 예수님의 나오라는 명령 한 마디에 도망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위와 서기관의 권위의 차이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전하느냐, 하나님을 모르고 아는척 하느냐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분명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호 6:3) 날마다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알아가야 합니다.(벧후 3:18)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욥 42:5) 내 입술로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구해야 합니다.(렘 1:9)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이 명하신 것을 말해야 합니다.(요 12:49) 하나님의 능력(고후 10:4)이 드러나는 그 자리에 치유와 회복과 구원이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세워집니다.(고전 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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