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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전한 삶
    교회력에 따른 본문 중심 설교 2009. 6. 13. 17:29

    성령강림절 후 제1주[20090607]

     

    눅 8:26-39(온전한 삶)

     

    현충일이 되면 방송을 통해 “오늘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희생한 애국 선열과 호국영령들의 넋을 기리는 현충일입니다”라는 멘트를 듣게 됩니다.

     

    그동안 무심코 듣고 넘어간 말이었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이것은 잘못된 표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전사한 애국자가 영혼의 상태로 공중에 떠도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공중에 떠도는 영은 있는가? 있다면 누군가? 우리는 흔히 이들을 악한 영, 사탄이라고 부릅니다. 원래 사탄은 타락한 천사입니다. 하나님처럼 되려다 하나님에게서 쫓겨나 하나님의 대적자가 된 영이 사탄입니다. 그리고 마귀는 사탄의 졸개들입니다.

     

    에베소서 6장에 나오는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이라는 말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말은 사탄이 공중에 떠돈다는 의미만은 아닙니다. 이 말은 영적인 세계,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사탄이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영과 혼과 몸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악한 영들이 우리 몸 안의 보이지 않는 세계인 영과 혼의 영역에 침투 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나라 전직 대통령이 자살한 것도 그 뒤에 어둠의 영이 충동질 한 것입니다. “뛰어내려 보라! 너 하나 죽으면 문제가 해결된다. 네가 누구냐? 서민을 위한 대통령 아니었냐? 내가 보장하건데, 네가 멋지게 죽으면 이번 사건도 마무리되고 네 식구들에게도 피해가 안가고, 게다가 너는 옛날의 대선 때처럼 영웅으로 멋지게 부활할 거야!”

     

    그러나 이러한 사탄의 말은 거짓말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합니다. 사탄은 거짓의 아비입니다. 늘 하는 것이 거짓말입니다. 과연 자살로 문제가 해결된다던 사탄의 말대로 될까요? 남은 자의 고통은 얼마나 계속될지 모를 일입니다.

     

    성경은 하나님만이 알파와 오메가라고 했습니다. 내가 죽으므로 모든 것이 끝이라는 생각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습니다. 끝은 없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가 분명 있는 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부자는 죽음 이후를 전혀 예측하지 못했음을 봅니다. 부자는 죽음 이후 음부에서 고통 중에 있다고 말합니다. 부자가 말하길,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도 이 땅에서만 통합니다. 살 동안에 주어지는 기회입니다. 부자는 단지 거지를 돕지 않아 음부에 간 것이 아니라 자기 집 앞에 항상 눈으로 보는 거지에 무관심했기 때문에 음부에 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무관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사로를 일으켜 함께 식탁에 앉히는 일은 당연한 일이어야 했습니다.

     

    이 부자는 마지막 탄원을 해봅니다. 자신은 비록 음부에 있지만 아직 저 세상에 살고 있는 남아 있는 자기 형제 다섯에게 나사로를 보내어 자기처럼 음부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러나 뭐라고 답합니까?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믿음이 없는 자는 이 땅에서 그 어떤 증언도, 심지어 어떤 신비한 현상을 보고도, 믿어야만 천국간다고 외쳐도 믿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난 것,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이 주어진 자체도 은혜이고, 살아있음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살고 안 살고는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결정할 일은 어떻게 살 것이냐 하는 것 뿐입니다!

     

    그러면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답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원래 계획하신 우리들 각자의 고유한 소명에 응답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귀신 들린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래의 모습에서 아주 심각하게 상태가 변형되고, 왜곡되었습니다.

     

    마가복음에 나와 있는 같은 본문에서는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 돼지 떼 이천 마리에게 들어갔다고 나와 있습니다.

     

    수많은 악하고 더러운 영들이 한 사람의 삶을 파괴하고 분열시킨 지 오래되었습니다. 가족들은 오래 전에 그를 포기했습니다. 이 사람은 거라사라는 대도시에서 벗어나 이제는 도시 변방 무덤을 자신의 거처로 삼았습니다.

     

    이 사람의 모습 속에서 보는 귀신들린 사람의 상태를 보겠습니다.

    1. 이 사람은 옷을 벗었습니다. 옷을 벗었다는 것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수치를 모르는 정신 나간 상태를 말합니다.

    2. 이 사람은 집을 떠난 지 오랩니다. 귀신 들린 사람은 집에 있기를 싫어합니다. 가정이 영혼의 안식처가 되어야 하는데, 가정도 그 기능을 못하고, 그 사람도 집에서 안식을 취하지 못합니다. 그 영혼에 진정한 평안이 없고 진정한 안식이 없는 불안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3. 이 사람은 무덤에 거했습니다. 무덤의 상태는 기도가 끊어진 상태, 주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미 영적으로는 사망한 상태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포기한지 이미 오래 되었다는 말입니다. 살아있는 목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온전하게 되는 과정을 본문은 어떻게 이야기 합니까?

    1. 먼저 이 사람은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정체를 밝힙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도망가거나 부인하거나 회피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을 피하고 숨는 일이 더 힘들고 괴로운 일입니다.

    2. 이후에 이 사람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영혼의 안식처는 예수님입니다. 우리 삶의 주인이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의 주인도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3. 주님은 온전해진 이 사람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시며, 또한 그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

     

    오늘 본문이 결론적으로 전해주는 메시지를 생각해 봅니다.

    1. 아무리 가족이라도 귀신들린 사람은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포기하는 대상은 없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이것이 복음전도의 원동력이 되어야 합니다.

    2.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날마다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자신이 병든 상태인지도 모르고 어떤 지위가 곧 자신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내 안의 교만, 시기, 탐욕, 탐심, 게으름은 없는지, 하나님 일에 대한 열정은 살아잇는 지 날마다 점검해야 되겠습니다.  

    3. 우리는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안에서 하나님이 일할 수 있도록 나를 열어놓아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교통하며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삶을 주님은 기대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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