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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완전을 향해 경주하라.
    교회력에 따른 본문 중심 설교 2014. 11. 22. 23:00

    창조절 마지막 주일(2014년 11월 23일)

    마태복음 5장 48절

     

    완전을 향해 경주하라.

     

     

    가. 완전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온전한’(텔레이오이)이라는 말은 구약의 ‘타밈’에 해당합니다. 신명기에 보면 “너는 여호와 앞에 완전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경우에 쓰였습니다(신18:13). 따라서 ‘완전하라’고 번역해도 무방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산상수훈 가운데 왜 ‘완전하라’는 명령을 하셨는지 생각해 봅시다. 여기서 ‘완전한’은 ‘텔로스’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목표, 끝’이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완전하라’고 하신 의도는 완전을 신앙의 목표로 두고 달려가라고 하신데 있습니다.

     

    오늘은 교회력에서 마지막 주일입니다. 신앙의 싸이클이 한 번 돌고 종점에 도착했습니다. “하늘 아버지의 완전하심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는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완전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신앙의 경주에서 결승점까지 완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마라톤으로 치면 42.195km 까지 달려야 하는데 나는 지금 신앙의 마라톤에서 결승점을 통과하였는지 한 번 점검해 보아야 할 때입니다.

     

    나. 완전의 목표를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아버지가 완전하게 계시기 때문에 너희도 완전하게 있으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너희도’라는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지만 너희는 완전할 수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너희도’ 완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완전의 목표에 너희도 도달할 수 있으니 포기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의 이 말씀 뒤에 제자들의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면서 이는 완전이 불가능한 것임을 깨닫고 주님 앞에 겸손하라는 교훈을 주는 것이라고 해설합니다. 또 어떤 이는 인간의 완전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여기서 완전은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는 칭의의 개념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오해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완전을 잘못 이해해서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명하셨습니다(레19:2). 우리 주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요13:34). 물론 우리는 하나님과 본질상(essentia) 똑같이 완전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완전하라, 거룩하라, 사랑하라’는 하나님을 닮아가라는(energia) 명령입니다.

     

    성경은 노아를 ‘완전한 자’라고 했습니다(창6:9). 욥도 ‘완전하였다’고 했습니다(욥1:1). 이들은 하나님이 보실 때 완전했다고 인정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완전의 목표는 도달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도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라”고 했는데 이는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엡4:15). 성도는 완전의 목표를 포기하지 말고 인내하며 결승점까지 달려가야 합니다(히12:1).

     

    다. 하나님의 기준이 완전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완전하라’고 하셨을 때의 완전의 의미를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본문 앞에는 여섯 개의 반제로 된 설교가 있습니다. 분노에 관해, 간음, 이혼, 맹세, 보복, 원수 사랑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모두 ‘너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한다’는 형식입니다.

     

    여기서 ‘너희들이 생각하는 바’란 모세의 율법이나 랍비들의 가르침 등 제자들이 배우고 알고 있었던 기준을 말합니다. 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는 이렇게 말한다’는 하늘 아버지의 뜻 곧 하나님의 기준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그러므로’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가치관을 전제하며 하나님의 기준에서의 완전을 이루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라’고 가르쳤습니다(엡4:15). 누구의 기준이냐가 중요합니다. 여기서의 사랑은 아가페입니다. 그런데 에로스적인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거짓은 아니지만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참입니다. 바울은 아가페 곧 하나님의 기준에서 참된 것을 말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에게 유익이 돌아갑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는 하나님의 기준인 완전에 있습니다. 그런데 완전을 내 기준의 완전으로 조정해서는 안됩니다. 사사시대는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삿21:25). 이것이 인간 기준의 완전이고, 내 기준에 맞춘 신앙생활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도달하지 못할 이상을 그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가치관을 선포하며 우리가 도달해야할 목표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라. 은혜를 구하며 완전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완전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완전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본문에서 “하늘 아버지가 완전하게 계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하게 있어라”고 했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완전과 우리가 완전해 지는 것에 차이가 있음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계시다”에서 ‘계시다’는 능동태입니다. 즉 하나님은 스스로 완전히 계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완전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너희도 완전하게 있어라”에서 ‘있어라’는 중간태로 쓰였습니다. 이는 완전해지는 대상은 나지만 완전하게 하시는 주체는 하나님이심을 내포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가만히 앉아서 수동으로 있으면 결코 완전해질 수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성숙해지도록 노력해야 완전해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딤전4:15).

     

    예수님은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고 하셨습니다(마5:46). 성도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는 완전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완전을 이루기를 기대하시며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완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이끄심을 거부하지 말고 합력하여 참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완전의 은혜를 더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완전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히6:3). 날마다 완전을 향해 경주하는 성도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시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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