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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완전한 사랑에 이르자.
    교회력에 따른 본문 중심 설교 2012. 8. 20. 17:11

     

    성령강림절 후 열둘째 주일[20120819]

     

    완전한 사랑에 이르자.(고전 13:4~7)

     

     

    몸은 어른이 되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을 심리학 용어로 ‘성인 아이’라고 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인데,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성숙하지 못하면 그것은 ‘영적 성인 아이’인 셈입니다.

     

    신앙생활은 미성숙함에서 성숙함으로 계속 변해가는 과정입니다. 또한 미숙하고 연약한 사람이 성숙하게 자라도록 도와주는 일이 영적 교제요 목회입니다. 대부분 신앙생활의 출발은 자기중심적이고 기복적인 수준일 수밖에 없지만 성장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나야 건강한 영적 성인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인 사랑도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는 유아적 사랑에서 완전한 사랑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유아적 사랑은 내가 아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관심 갖고,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나 일을 두려워합니다. 이러한 유아적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러한 사랑에 머물러서는 안되고 반드시 완전한 사랑으로 자라나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사랑은 ‘완전한 사랑’입니다. ‘완전한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며 견딘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다’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완전한 사랑’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래 참음과 온유함은 서로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사랑 안에 오래 참음과 온유함이 모두 포함되어 있듯이 이 둘은 함께 공유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먼저 ‘오래 참음’이라는 사랑의 특성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완전한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무엇을 참는다는 말일까요? 여기서 ‘오래 참음’이란 외적 환경 보다는 다른 사람에게서 받은 악행과 손해를 견뎌낸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거짓에 속거나 악한 일을 알고도 당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살다 보면 눈 뜨고도 당하고 감언이설로 속아 넘어가는 일도 생길 수 있습니다. 사랑의 본질이 오래 참음이라는 말은 자신에게 악한 일을 행한 사람일지라도 악으로 갚지 말고 참고 기다려 주라는 것입니다.

     

    상처를 입거나 손해를 당하면 분한 마음, 미워하는 감정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오래 참음’은 이러한 마음을 억지로 삭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할 때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에 대해서도 완전한 사랑으로 대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말씀을 체질화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살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우리를 참고 기다리고 계심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우리 같은 죄인도 기다려 주신 것입니다.(애 3:22)

     

    계속해서 사도 바울은 ‘사랑은 온유하다’라고 말합니다. ‘완전한 사랑은 온유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오래 참음이 나에게 상처와 손해를 준 사람에 대해 견디는 것이라면 온유함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능동적으로 그 사람을 선하게 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온유함은 모든 사람에게 베푸는 선한 마음의 상태로 ‘노하기를 더디하는 마음’과도 같습니다.(잠 16:32) 야고보서에서는 온유함으로 대하는 사람을 지혜와 총명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약 3:13) 사도 바울은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선으로 대하라’고 권면합니다.(살전 5:15) 이것이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식이기도 합니다.(롬 12:21)

     

    이러한 오래 참음과 온유의 모습을 우리는 요셉에게서 보게 됩니다. 어린 시절 형들이 자신을 이집트의 노예로 팔아버린 이후 절망과 고통의 시간 속에서도 요셉은 신앙으로 인내하였습니다. 후에 요셉은 이집트의 총리까지 오르게 됩니다. 가나안에 기근이 들고 요셉의 형들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이집트까지 찾아 왔을 때 생사도 알 수 없었던 동생이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있었고 그들은 서로 마주하게 됩니다.

     

    이때 요셉은 한 마디도 억울한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 45:8)

     

    이것이 요셉의 오래 참음이요 온유함입니다. 자신에게 악을 입힌 사람에게 선대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성숙한 요셉의 모습을 보며 완전한 사랑 안에는 용서가 있고, 치유가 있고, 구원이 있음을 봅니다. 사도 바울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이러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에베소서 4장 1절에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엡 4:1~2)

     

    우리는 성경의 핵심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진리를 압니다. 하나님 사랑을 경험하고 깨달은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게 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사랑을 안다고 하면서고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랑하라고 가르쳐주신 고린도전서 13장에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랑하라!’ 내 방식으로의 사랑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왜곡된 사랑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사랑을 하되 내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랑을 배우고 사랑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고 인생을 선물로 주신 것이 곧 하나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보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는 것입니다.(요일 4:10) 성경은 분명 완전한 사랑이 있다고 말합니다.(요일 4:18) 이 사실을 알고 우리에게 허락하신 생 동안 사랑하는 사람들로 완전해져 나가길 원합니다.(히 6:2)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자들은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변해가야 합니다.(골 3:12)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예수님이 이제 이러한 사랑을 우리도 행하길 원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마 11:29)

     

    우리는 살면서 여러 가지 실패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진짜 실패는 사랑을 배우지 못하고 인생을 마치는 것입니다.(요일 3:17) 저는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오래 참고 온유한 완전한 사랑에 이르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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