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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합니까?
    교회력에 따른 본문 중심 설교 2011. 6. 21. 03:05

    성령강림절 후 제1주일/삼위일체주일[20110619]

    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합니까?
    (막 9:14-29)


    지구가 하나의 큰 마을이 되어버린 지구촌에 인터넷으로 동시대 공존하는 이들의 소식을 접하며 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번 주도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피조 세계가 파괴되고,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는 소식들을 듣게 되었습니다. 리비아에서 일어난 입에 담지 못할 만행, 여성운전이 금지된 사우디아라비아의 남녀차별, 북한에서의 인권유린 상황 ... 우리가 이런 일들을 접할 때마다 마음 한 구석에서 탄식이 나오는 것은 우리 모두는 똑같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진정한 제자도의 주제를 담고 있는 처음 복음서 마가복음은 8장에서 예수님이 자신의 고난과 죽음, 부활 예고 후 제자도의 조건을 말씀하시는 대목에서 주제의 절정을 이룹니다. 그리고 8장의 마지막 절에서 의미 있는 말씀을 하나 하십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막 8:38)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이 결코 쉽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사람 뒤에 시대와 세상의 정신을 장악한 음란하고 더럽고 포악한 사탄의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을 1, 2부로 나누어 본다면 8장까지 1부이고, 9장부터 2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2부의 처음도 1부의 처음과 같이(막 1:11)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마가는 알리고 있습니다.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막 9:7) 이렇게 2부의 시작인 9장은 예수님의 변모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이야기 하면서,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소년을 고치시는 이야기로 무대를 전환하고 있습니다.

    본문 14절입니다. “이에 그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 앞서 산 위에서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이 있었다면, 지상에서는 인간의 비참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산에 올라가지 않았던 제자들과 서기관들이 논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싸움 이였을까요? 18절을 보니까 제자들이 귀신 들린 소년을 고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우리 선생님은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으실 수 있다.” 서기관들과 사람들은 “너희 선생이 누구냐, 너희 선생 데리고 와봐라, 너희 선생도 너희처럼 귀신도 못 쫓아내는 가짜 선지자 아니냐?” 이런 언쟁이 벌어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때 제자들 편에서 천군만마인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신 것입니다. 15절 말씀입니다.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매우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왜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놀란 것입니까? 아마 두 가지 이유에서 일 것입니다. 제자들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때 마침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또 온 무리가 놀란 것은 광채 나는 예수님의 변모된 모습 때문일 것입니다.

    소년의 아버지가 말하는 아이의 상태는 심각합니다. 악한 영이 그 아이를 사로잡으면 땅에서 뒹굴고, 거품을 내뿜고, 이를 갈다가, 몸이 뻣뻣해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로잡는다’(카타람바노)는 말은 ‘완전히 소유로 만든다, 포로로 만든다’는 뜻으로 악령에게 한번 사로잡히면 인간의 존엄성은 사라지고, 추하고, 더럽고, 제어 불능의 상태가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은 이 아이를 휘어잡고 있는 귀신을 정확하게 지목하며 내쫓습니다. 15절입니다. “더러운 악령을 꾸짖으시며, 말 못하게 하고, 듣지 못하게 하는 악령아! 들어라. 그 아이에게서 썩 나와 다시는 들어가지 마라! 하고 호령하셨다.”(공동번역) 귀신도 여러 종류가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 6장 12절에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하였습니다. 악령의 실체가 여러 종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본문 29절에서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신 것도 이 아이를 완전히 소유한 악하고, 더럽고, 말 못하게 하고, 듣지 못하게 하는 영과 육을 조종하는 아주 지독한 종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오늘 말씀은 귀신 들린 아이를 예수님이 고쳐주시면서, 사람들에게 기도해야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는 단순한 교훈을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문자적으로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만 마가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분명 그것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귀신 들린 아이가 문제라면 문제 해결을 위해 제자들과 서기관들이 변론을 했고, 아이의 아버지도 문제 해결을 위해 예수님을 찾은 것이 됩니다. 결국 문제 해결의 방편으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되는 셈입니다.

    본문은 마가복음 2부를 시작하는 예수님이 변모하신 사건과 관련하여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9장 2절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과 함께 산에 올라가셨다는 것은 기도하러 가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기도하는 가운데 거룩한 모습으로 변모하셨다는 말씀은 깊은 기도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의미합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합니다. 그중에서도 마가복음은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친밀한 깊이를 더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4장에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기도할 때 유일하게 마가복음에서만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

    그런 의미에서 마가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기도를 정의해 본다면, 기도란 하나님과의 깊은 인격적 관계 또는 교제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산 위에서의 예수님의 거룩한 모습, 땅 위에서의 인간의 처참한 모습이 대비되고 있는 가운데 마가는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이런 깊은 기도의 경지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내가 얼마나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느냐 이것이 곧 믿음의 상태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경지와 세상에서의 제자들, 서기관, 사람들의 경지가 다르다는 것을 대조적으로 말해줍니다. 이것이 믿음의 차원으로 믿음의 눈이 열린 사람은 믿음으로 행하고(walking by faith), 그렇지 않은 사람은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는(walking by sight) 상태라고 구분되고 있는 것입니다.(고후 5:7)

    예수님은 어떤 문제 이전에 사람들의 믿음의 상태가 어떠한지 우선 관심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관심은 언제나 눈앞에 펼쳐진 문제 해결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소년의 아버지도, 제자들도 모두의 관심은 문제 해결에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믿습니다, 믿습니다, 주여, 주여”를 외치는 것도 사실은 진짜 믿음이 있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믿습니다”를 외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그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해서, 정죄하려고 다가선 적이 없음을 봅니다. 예수님은 세리장 삭개오의 삶이 어떤지 아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죄를 지적하지 않으셨습니다.(눅 19:5)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사람들이 돌로 치려할 때 그 여인의 죄를 들추려고 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모함하는 사람들의 악한 마음을 돌아보게 하셨습니다.(요 8:7)

    예수님의 관심은 언제나 사람들 마음속의 믿음의 상태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물에 빠지는 베드로 보고 붙잡으면서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하셨습니다.(마 14:31) 본문 19절에서도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라고 탄식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보시는 믿음의 상태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본문 21절입니다. “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이르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22절,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이때 소년의 아버지의 말은 믿음의 말이 아닙니다. 문제의 심각성을 아는 자체가 곧 믿음이 아닌 까닭입니다. 절망적이고 심각한 고통의 상태에 좌절하며 아마도 제자들 때문에 한 번 더 좌절했겠지만 이 아버지의 “고쳐주실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희망은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문제 해결의 방법으로 “주여, 주여” 하고 외치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오히려 믿음의 첫 단계는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23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이 책망하시자 이 소년의 아버지가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분명한 것은 이 아이 아버지의 믿음의 상태가 불신앙에서 부족하나마 작은 믿음의 상태를 보였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누가 강요한다고 믿어지는 것도 아니고, 마지못해 형식적으로 따라한다고 믿는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를 못 믿습니까? 교만한 사람이 믿지 못합니다. 자신이 주인인 사람은 절대 예수를 믿을 수 없습니다. 자기를 낮추는 사람만이 믿을 수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낮아짐에서 부터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의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간절한 마음이 믿음입니다.

    따라서 불신앙의 상태에서 작은 믿음의 상태라도 생겼다는 것은 기실 성품 또는 성격도 변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격이 거친 사람이 성격은 그대로이면서 믿음의 상태가 올라갈 수는 없습니다. 죄악된 성품이 그대로이면서 믿음의 상태가 좋아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바로 예수님의 관점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관점은 보이는 현상에 있습니다. 땅에 것에만 관심 있습니다. 내 건강, 내 자식, 내 사업, 내 문제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찾아도 문제 해결을 위해 찾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점은 우리의 믿음의 상태에 있습니다. 믿음이 생기면 영혼이 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생기면 천국이 깃들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생겨야 진정한 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기도라는 것도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억지로 기도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기도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23절의 예수님의 말씀이 중요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불신앙의 아버지를 대상으로 하셨지만 그 자리에 있던 제자들에게도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진짜로 네가 믿느냐?’는 것입니다.

    24절의 아버지의 응답입니다.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불신앙의 아버지였지만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상태를 외칩니다. 어떤 사본에는 “울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고 말합니다. “믿음 없는 나를 도와주십시오!”

    나중에 제자들이 물어봅니다. 28절,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바로,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입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 없이 지독한 이런 종류의 악령이 나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깊은 인격적 교제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신 후 옷에 광채가 나는 모습으로 변형되셨다는 말씀은 그만큼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에 들어가셨다는 말씀이고,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에 들어가셨기 때문에 당연히 능력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문제 해결 이전에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가 우선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이 아버지의 불완전한 반응에도 선행 은혜로 다가오시어 어린 한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시키시는 예수님입니다. 사실 나에게 진정한 믿음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부터가 믿음의 출발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드러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죄진 것을 모르셔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신 것이 아닙니다. 부끄러워도 나뭇잎을 먼저 벗어야 합니다. 그러면 가죽옷을 입히시는 하나님의 회복의 은혜도 반드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악령을 쫓아내는 능력은 오직 능력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올바른 믿음의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이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기쁜 소식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요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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