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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이방인의 순종
    교회력에 따른 본문 중심 설교 2012. 2. 12. 04:23


    주현절 후 여섯째 주일[20120212]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이방인의 순종
    (왕하 5:1-14)


    주현절 후 여섯째 주일을 맞았습니다. 거룩한 아침에 주님의 동산에서 예배드리는 성도님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부어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세계에 작은 것까지도 돌보십니다. 시편 기자의 표현처럼 “그가 ... 땅을 위하여 비를 준비하시며, 산에 풀이 자라게 하시며,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시 147:8-9)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길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라고 하셨습니다.(마 5:45)

    하나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 땅의 모든 민족과 나라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이 일반적인 사실이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이방인인 우리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보배 삼으시고(출 19:5), 제사장 나라로 구별하셨다는(출 19:6) 사실을 보며 왜 하필 이스라엘이어야만 하는가 라고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고, 우리는 그것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선민 이스라엘 이야기의 시작은 아브라함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고 피조물을 신으로 섬기며 하란에서 살던 아브람을 하나님이 부르셨고 아브람이 이에 순종합니다.(창 12:4)

    부르심에 순종하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땅을 약속하시고(창 15:18), 씨를 약속하십니다.(창 15:4)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 이르는 영원한 언약을 세우십니다.(창 17:7)

    아브라함의 씨가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고, 야곱에게 주어진 새 이름 이스라엘, 그 이스라엘 자손이 요셉 때 애굽으로 이주하여 갔는데 세월이 흘러 약 4백년이 지난 때 그들은 애굽에서 노예로서 고통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때 성경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어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창 3:10) 라고 말씀하십니다.

    정리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자신의 백성을 애굽에서의 고통과 압제에서 구원하시고자 하셨고, 결국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하기에 이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왕정국가가 된 이후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여호와를 위한 성전까지 지었음에도 불구하고(왕상 6:38), 집권 말기에 많은 이방 여인들을 후궁으로 데려옵니다.(왕상 11:3) 솔로몬은 결국 여호와를 섬기는 마음이 떠나고 이방신들을 따르기까지 이르게 됩니다.(왕상 11:10)

    이후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남 유다의 왕이 되고(왕상 12:17), 솔로몬의 대적자였던 여로보암이 북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며(왕상 12:20) 남과 북으로 분열하게 됩니다.(주전 922년)

    남북이 분열된 이후 남 유다의 히스기야(주전 715-686년)와 요시아 왕(주전 640-609년) 때를 제외하면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들의 대부분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바알과 아세라 상을 만들고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고 하는 것이 성경이 증언하는 바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언약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배교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언약의 하나님은 무조건 이스라엘 편이신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피로 맺은 언약(창 15:10, 출 24:8)에 순종하지 않은 대가는 심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배경을 생각해봅니다. 열왕기하 5장 1절입니다.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본문은 북 왕국의 여호람 왕(주전 852-840년) 때 일어난 일을 배경으로 합니다. 이 시기 아람 곧 시리아의 왕은 벤하닷(Ben Hadad) 1세입니다. 당시 아람 왕의 총애를 받고 있는 군대장관이 있었으니 나아만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떠나자 이방 나라를 들어 쓰셔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십니다. 열왕기서를 기록한 목적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열왕기서의 저자는 왕들의 배교를 지적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선지자의 음성에 순종하지 아니한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배경에서 본문을 다시 본다면 훨씬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나아만을 들어 아람을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셨다”라는 본문 5장 1절의 말씀은 이방 나라의 어떤 군대장관 한 사람이 하나님을 잘 섬겼다 라는 그런 뜻이 아니라 이방 나라를 통해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심판하셨다는 표현으로 이해하여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할과 이방 나라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별하여 부르신 목적이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로(시 89:14) 이 세상 나라와 민족을 다스리는 제사장 나라로 삼고자(출 19:6)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법도대로 행하지 않고 불순종과 배교를 하는데도 무조건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란 이스라엘이 이런 역할을 못할 때 이방 나라를 사용해서라도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방 나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선민이 아니라고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된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이방 나라와 민족들도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수 6:25) 오늘 본문은 바로 이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아람을 구한 구국공신이고 아람 왕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나병이라는 숨길 수 없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물론 여기서의 나병으로 쓰인 ‘메츠라’는 살이 썩어서 떨어져 나가는 나병이 아닌 피부가 희어지고 건조해지는 악성 피부질환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어쨌든 나아만은 이것이 자신을 괴롭히는 아킬레스건이 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나아만에게 부인으로부터 이 병이 나을 수 있다는 뜻밖의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잡아온 어린 소녀의 조언이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에 가면 선지자가 계시는데 그분에게 가면 나을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아람 왕은 당연히 나아만이 갈 수 있도록 허락할 뿐 아니라 편지까지 써서 보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왕은 무슨 선전 포고인 줄 알고 옷을 찢었고, 이 소식은 결국 엘리사의 귀에 까지 들리게 됩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을 자신에게 보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나아만은 말과 병거들을 이끌고 또한 엄청난 예물과 함께 드디어 엘리사의 집 앞에 도착했습니다. 본문의 갈등은 바로 여기서 일어나게 됩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을 만나 보지도 않고 자신의 종을 보내 처방전을 대신 전하게 합니다.

    지금 이스라엘 보다 강대국인 아람의 그것도 2인자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이렇게 찾아왔는데 나와보지도 않는 것에 나아만은 모욕을 당한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사의 종이 대신 가져온 처방전이란 것이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는 것입니다.

    나아만은 무척 자존심이 상하고,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치료방법에 화가 나서 돌아가자고 합니다. 다시 일행을 데리고 돌아가는 와중에 나아만의 종들이 나서서 장군에게 간청을 하는 내용이 본문 13절입니다.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이 말을 쉽게 말하면 “요단강에서 씻는 일이 힘든 일도 아니고, 무슨 위험한 일도 아닌데”(유진 피터슨 역) 여기까지 와서 한번 요단강에 가 보기나 하자는 종들의 간청인 것입니다. 종들의 간청과 설득에 결국 나아만은 요단강으로 내려가 일곱 번 몸을 씻었고 그러자 그의 살결이 어린 아이의 살결처럼 깨끗하게 회복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단순히 나아만이 엘리사의 말씀에 순종하여 나병에서 고침받았다는 그런 단면의 교훈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 졌습니다. 그렇다면 나아만이 고침 받는 이 이야기 속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부어주시기를 원하는 진리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첫 번째로 본문은 이스라엘 왕의 불신앙과 이방 사람 나아만의 순종을 대조시켜 보여줌으로써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촉구하는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본문 7절에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는 말씀은 이스라엘 왕의 불신앙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반면 본문 14절은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라고 하여 자존심을 내려놓고, 자기 생각도 내려놓은 순종을 통해 나병에서 깨끗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이방인의 입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참 신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하에 계속 있기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서 속히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은 최후 심판까지의 자비와 공의일 뿐입니다.
     
    이방 사람 나아만의 나병의 치료는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하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구원의 간절함을 질투할 정도로 사모하게 하고자 함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롬 11:11)

    예수님께서도 회당에서 이사야의 글을 읽으시고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다"(눅 4:21) 하셨을 때에 회당에 있는 자들에게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이방인의 순종과 대조하며 전하였던 말씀 가운데 하나가 이방 사람 나아만이 병 고침 받은 이 이야기입니다. "선지사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눅 4:27)  

    두 번째로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방인인 우리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언약의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 순종이 구원의 조건으로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배교로 인해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입니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하나님의 종 선지자들을 보내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고발하였지만 이스라엘은 순종하지 아니하였습니다.(렘 25:4) 끝내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어 복음의 진리에 순종하고(벧전 1:22),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자들 누구에게나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벧전 2:2) 예수님은 영원한 언약의 피로(히 13:20), 유대인과 이방인의 막힌 담을 허시고(엡 2:14),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새로운 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히 10:20)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구원의 문이 이스라엘에게만 열린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열렸다는 선포를 하십니다.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눅 13:28-30)

    하지만 이방인에게도 기회가 왔을 뿐 구원의 문은 여전히 좁다고 예수님은 강조하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이방 사람 나아만 장군이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가 나병이 고침 받음 사건은 우리에게도 이러한 동일한 순종을 요구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내 생각, 내 판단, 내 상식, 내 환경을 뛰어넘는 믿음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룬 사람들은 순종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순종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노아는 순종하기 어려운 시대 속에서도 하나님의 명하신대로 준행하여 방주를 만들었습니다.(창 6:30)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함으로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갔고(히 11:8), 아들 이삭을 번제할 어린 양으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습니다.(창 22)  

    악한 세대에 온전히 여호와께 순종한 갈렙은 약속의 땅을 허락 받습니다.(신 1:36) 하
    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때 여리고는 무너지고 전쟁에서 승리하였습니다.(수 6:20) 예수님도 고난을 통과한 순종으로(히 5:8)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빌 2:8)

    말씀에 순종할 때 비로소 구원의 역사는 일어납니다.(창 22:13) 말씀을 순종하는 자리에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있습니다.(행 3:7) 하나님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생명의 성령의 법을 주셔서 말씀에 순종하게 하십니다.(롬 8:2) 예수님에게 순종하는 자에게는 영원한 구원을 약속하십니다.(히 5:9) 예수님에게 순종하는 자에게는 영생의 복을 베풀어 주십니다.(요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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