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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생의 의미를 찾아라.
    교회력에 따른 본문 중심 설교 2008. 3. 30. 23:07

    Cast your nets on the other side!

     

    부활절 둘째주일[20080330]


    인생의 의미를 찾아라.(요 21:1-14)

     

    1. 믿는다는 것은?

    성경의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은 창조주요,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을 경외하라, 하나님께 경배드려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 이것이 피조물 인간이 행할 바 마땅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도, 인간이 이성적으로 믿을만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내가 믿을 만해서 믿는다면, 그 사람은 평생 가도 못 믿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판단의 대상이 아닙니다. 어찌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을 판단하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창조주인양, 자신이 이 세상을 다 만든 양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 안에 뿌리박힌 교만이라는 죄성은 사람들을 소경으로 만들어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교만이 박혀있는 한 우리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있는 한 우리는 실패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리는 한 우리는 배신자일 뿐입니다.

     

    신앙생활이라 함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데, 그러면 하나님 사랑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성경 읽고, 기도하고, 예배 열심히 드리는 것이 하나님 사랑입니까? 물론 하나님을 사랑하면 성경 읽고, 기도하고, 예배 드립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 그러한 삶은 곧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4절에,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사랑을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형제자매를 용서하고,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2. 배신한 제자들의 모습

    지난 주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가장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 주신 이야기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자들은 다 주님 곁을 떠나갔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구원의 은혜를 잊지 않았고, 주님을 끝까지 사랑한 여인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순결한 신부같은 믿음을 지닌 그녀에게 부활의 기쁨을 전해주었습니다.

     

    그 날 저녁, 부활하신 주님은 두려워하며 숨어있던 제자들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그때 도마는 없었는데,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는 도마에게 그 날 이후 여드레가 지나 다시 나타나십니다. 오늘 말씀은 이제 며칠이 더 지나고 또 다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디베랴 호수에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건입니다.

     

    디베랴는 갈릴리 호수 서안의 도시입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뿔뿔이 흩어졌는데, 어찌해서 일곱 명의 제자들은 갈릴리까지 왔을까요? 마태복음 28장을 보면 어느 정도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빈 무덤을 찾아 온 여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마태복음 28장 9절을 보니까, 예수님께서 갑자기 나타나 “평안하냐?”고 인사를 하자 여자들은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여자들은 이 말씀을 분명 제자들에게 전했을 것입니다. 그럼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그들은 반신반의했을 것입니다. 요 며칠 사이의 일은 제자들에게 도무지 이해가지 않는 사건이었고, 자신들이 그렇게 따르던 선생의 죽음으로 그들은 갑작스런 혼돈 상태에 직면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는 허무한 상태였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여인들이 전해준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속으로 얼마나 오래 간직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수님이 죽으신 후 여드레 이상이 지나 제자들은 원래의 삶의 터전인 바다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붙잡혔을 때, 자신의 목숨이 더 중요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가 메시야가 아니였다면 몰라도, 예수님은 메시야였고,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본 이상, 그들 스스로는 더 이상 제자라는 말이 어울리는 않음을 인정했을 것입니다. 이제 그들의 신분은 주님을 떠난 죄인이요, 실패자요, 배신자일 뿐입니다.

     

    3. 실패한 인생의 원인

    그런 그들에게 주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런데 전과는 상황이 조금 다릅니다. 예루살렘에 숨어있을 때가 아니고, 지금은 고향으로 내려와 주님을 만나기 전 일했던 자신의 본업으로 돌아온 때입니다. 당장 입에 풀칠해야 되는데, 무슨 새로운 일거리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다시 고기 잡는 일이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3절에서 베드로가 하는 말입니다. “나는 물고기를 잡으러 가노라.” 나는 고기 잡는 일을 다시 하겠다는 말입니다. 나머지 사람들도 함께 하겠다고 나섭니다. 그러나 원래 어부였지만 오랜만에 다시 해보는 일에 성과가 없었습니다. 그 때, 주님이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들은 그렇게 했고, 물고기가 엄청나게 많이 잡혔습니다. 이 때,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 곧 요한이 외쳤습니다. “주님이시라!” 주님은 시몬을 처음 부르던 그 때와 똑같은 일을 재현하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배에서 무리에게 설교하신 후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시몬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요한의 외침에 갑자기 정신차리게 된 베드로는 벗고 있던 겉옷을 황급히 입습니다. 주님에 대한 예의입니다. 주님의 낯을 피했던 베드로였지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던 베드로였지만 주님 앞으로 달려갑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시몬에게 상기시켜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는 말씀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5절에서 주님은 물으십니다. “고기가 있느냐?”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물을 배 오른편으로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랬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찾았던 인생의 의미인 물고기를 그들은 스스로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떠난 인생은 헛수고일 뿐임을 주님은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자신을 처음 불렀을 때의 그 음성,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어부인 자신의 경험과 기술 앞에서 들렸던 그 말씀의 의미는 “네 힘으로 사는 인생은 헛될 뿐이다, 공허하다,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4. 죄인을 부르시는 주님의 초대

    예수님은 육지에서 숯불을 준비하고 베드로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는 말씀에 베드로는 주님 곁으로 와서 잡은 생선을 불 위로 가져왔을 것입니다. 베드로에게는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성급한 성격이라고 해도, 자신이 했던 말을 잊어버렸을 리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말씀하실 때, 베드로는 자신있게 소리쳤습니다.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막 14:29)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오늘 밤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을 예언하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히시고, 사람들에게 뭇매를 맞으실 때, 사람들의 눈을 피해 멀리서 자신의 스승의 초라함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래 뜰에서 추위를 피해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그 때, 대제사장의 여종이 “당신도 같은 무리 아니냐”(막 14:67)고 추궁하자 극구 자신은 예수를 모르노라고 세 번이나 부인하기에 이릅니다.

     

    예수를 부인하면서까지 낯선 사람들의 온기에 자신의 몸을 맡겼던 베드로, 이제 그는 예수님이 마련해 놓은 따뜻한 불가에 자신의 얼었던 몸을 녹입니다. 예수님은 굳이 베드로의 죄와 허물을 말하지 않으시고도 그에게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주십니다. 심지어 다른 제자들에게 조차 떡과 생선을 나누어 주시면서, 오병이어의 현장(요 6:11)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예수를 떠난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보여주십니다.

     

    그들이 애써 찾고자 한 그들 인생의 의미인 물고기(익투스)를 그들은 찾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들이 찾아야 하는 인생의 의미가 세상에 있지 않고, 예수 안에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떠나고, 배신한 그들에게 먼저 다가와 주님의 식탁에 초대하십니다. “조반을 먹으라.” 주님이 준비하신 조반(아리스타오)은 정성이 들어간 식사입니다. “어부들인 너희가 잡지 못한 물고기를 나는 맛있게 요리해서 주노라. 나에게 다시 오라!”

     

    5. 용서하십시오.

    예수님이 배신자 베드로에게 보여주신 모습은 정죄가 아니라 용서였습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용서하시며 허물을 덮어두십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죄를 지적할 때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을 보여줄 때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정말 힘든 일이 자신에게 악을 행한 사람을 찾아가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득이 되는 사람을 찾아갑니다. 이 세상에서 힘 좀 쓰고, 영향력 있는 사람을 찾아갑니다. 가난한 사람을 찾아가고, 실패한 사람을 찾아가는 일은 좀처럼 보기 힘듭니다. 하물며 원수 같은 사람, 자신을 배신한 사람을 누가 찾아 가겠습니까?

     

    예수님은 배신자 베드로를 찾아 가셨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정죄도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용서하시고, 사랑으로 품으십니다. 예수님은 삶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도 용서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6. 인생의 의미를 찾아십시오.

    누가복음 19장에는 삭개오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삭개오가 먼저 예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먼저 삭개오를 찾아가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눅 19:1).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먼저 갈릴리로 가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비록 자신을 배신하고 떠난 제자들이었지만 다시 그들을 용서하시며 찾아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너의 실패는 내 말을 떠난 데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삶은 헛된 인생일 뿐입니다. 자신의 지식, 자신의 경험, 자신의 생각이 성공을 불러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힘으로 하는 수고는 모두 헛될 뿐입니다. 예수를 떠난 제자들의 삶은 허무였습니다.


    인생의 의미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에만 찾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그물을 던지려 하십니까? 인생이라는 바다에 내 생각과 내 힘으로 그물을 던져, 내 수고로 먹고 살겠다는 것은 교만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우리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요 15:5)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옛날의 기억들을 되살리시면서, "나를 떠난 인생은 무의미하고, 헛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인생의 의미는 오직 주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요 21:6)는 주님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자신의 힘과 기술, 돈과 지위를 의지하지 말고(시 146:3), 오직 주님만 의지하며 살 것을 부탁하시는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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