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잔치 자리에 앉게 됩니다.
    교회력에 따른 본문 중심 설교 2013. 3. 25. 02:50

     

    종려주일[20130324]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잔치 자리에 앉게 됩니다(눅 13:22~30)

     

     

    우리는 성경을 신앙생활의 의무감으로 읽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으로서 읽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다면 우리의 머릿속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가 그려질 것입니다.

     

    교회의 전통이 만들어 놓은 교리에 매여 성경을 보지 못하고, 성경 안의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지 못한 채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실제 그 사람은 종교 행위를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교리 위에 성경이 있고, 성경 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면서 구원에 대해 말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가 구원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시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진리를 가르치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아시는 분이시기에 하나님의 마음을 설교하고 구원의 길을 가르칠 수 있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시기 시작할 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에 모여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귀신을 내쫓고 병자들을 고치신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오천 명이 넘게 모였을 때 그들은 오병이어로 배불리 먹는 경험도 하였습니다.(눅 9:17)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사람은 나름의 필요를 채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은 예수님이 전하시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 복음의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치유와 이적을 보여주시는 가운데서도 이면적 메시지를 전하셨지만 사람들은 쉽게 깨닫지 못하였습니다.(요 6:26)

     

    먹고 마시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르치는 말씀에서 심각성을 느끼지 못했지만 개중에는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어떤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영적인 관심을 보인 한 사람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23절) 예수님의 가르침은 듣는 이들에게 도전을 주고 기존 전통에 저항하는 해석들을 하셨습니다. 때문에 이런 질문이 나오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원받을 사람의 수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십사만 사천 명도 구원 받는 수의 상징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율법을 잘 지키면 그 수에 들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면 유대인으로서 받아들이기 힘든 메시지들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이방인들도 구원의 길이 열려있음을 말씀하셨고, 유대인도 예외 없이 회개하고 깨어있어야 하는 삶을 강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원 받을 사람이 적습니까?”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라고 대답하십니다.(24절)

     

    예수님이 구원 받을 사람의 수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관심이 아니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니고 구원 받을 만한 삶을 살았느냐에 관심하신다는 것입니다.

     

    24절에서 예수님이 구원을 ‘좁은 문’으로 표현하신 이유는 구원의 길로 가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힘쓰다’라는 말의 어원 ‘아고니조’에는 고통과 눈물이 따르는 노력이 요구된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 얻을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은혜는 값비싼 은혜입니다. 이 진리를 깨닫고 응답하는 자만이 결국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설교하신 '큰 잔치 비유'가 이런 의미입니다. 초대 받은 자가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실제 잔치 자리에 참여하는 자가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눅 14장)

     

    25절에 보면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라고 말씀합니다.

     

    구원의 문이 한 번 닫히면 열리지 않는다는 말씀은 구원의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사실을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오해하여 '포도원의 비유'에서처럼 오후 다섯 시에 부름을 받고도 한 데나리온을 받은 사람을 부러워하고(마 20장),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 중에 한 명이 구원 받는 것을 부러워하면 안되겠습니다.(눅 23장)

     

    내일로 미루다 보면 구원의 기회를 놓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르고 언제 주님이 다시 오실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꾸 미루다 보면 오래 신앙생활을 하였지만 하나님 나라와 상관없는 자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30절)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천국 잔치에 참여하기 위함입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는데 마지막 날 주님이 ‘나는 너를 모른다’고 한다면 그 얼마나 부끄럽고 억울한 일이겠습니까?

     

    26절 이하입니다. “그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주님이 ‘나는 너를 모른다’고 하시는 말씀은 ‘너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문자적 말씀이 아닙니다. ‘너는 하나님 나라와 상관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 앞에서 먹고 마시고, 길거리에서 말씀을 배웠다’는 것은 종교적 행위를 한 것입니다.

     

    종교적 행위가 구원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지켜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종교 행위가 좋은 의미로 악한 일을 행하지 않은 것의 실천이라면 말씀대로 지켜 행한 것은 적극적인 선행입니다.(약 4:17)

     

    ‘행악’이라 말 ‘아디키아’는 하나님의 의를 떠난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종교 행위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기준대로 사는 것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좁은 문이 있다고 하시는 말씀은 넓은 문도 있다는 말입니다. 넓은 문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을 분산시키고 죄악으로 유혹하는 세상의 문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크고 넓은 문은 멸망으로 끝난다고 경고하셨습니다.(마 7:13)

     

    자신은 넓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 사람은 이미 넓은 문으로 들어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씀에는 그만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을 찾아 들어가려는 사람이 드물고 또한 그 길이 험하여 가는 것도 쉽지 않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습니까? 좁은 문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아는 자만이 찾고 들어가고자 힘씁니다.(마 13:44~46)

     

    예수님은 본문 앞에서 하나님 나라가 어떠한 지 비유로 설교하셨습니다. 작은 겨자씨 한 알은 나중에 새가 깃들만한 큰 나무가 되고, 적은 양의 누룩이 백 인분의 빵으로 부풀어 오르는 것과 같이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너무나 초라해 보입니다. 예수님이 마음의 눈을 열어주셔야만 보입니다.(눅 24:45) 하나님 나라의 문은 좁은 문입니다. 구원으로 인도하는 이 문은 이 땅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자가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눅 9:23)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일’은 누구나 해야 할 일이고, 바로 지금 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보장되었다고 착각하며 종교 행위만 일삼았던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28절)

     

    천국 잔치에 참여하여 영생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과 밖에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사람들과의 차이는 엄청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회를 놓쳐버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고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눅 16장)

     

    예수님이 가르치신 ‘좁은 문’ 비유는 이 시대 우리에게 세상의 삶에 저항하는 깨어있는 삶을 일깨웁니다. 다수가 불의를 저지르는 것을 알면서도 관망하는 것을 처세술이라고 가르치는 세상에 저항할 수 있어야 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사람은 진리를 붙드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비록 세상에서는 고생을 겪지만 천국에서는 하나님의 잔치 자리에 앉게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고 약속합니다.(29절)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 곁에 오셔서 믿음과 용기를 주시며 동행하고 계시기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우리의 발걸음은 결코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