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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
    교회력에 따른 본문 중심 설교 2008. 3. 16. 22:10

    종려주일[20080316]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마 26:47-66)

     

    몇 달 전의 일이었습니다. 그 주간 저는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욕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인간은 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욕을 하는 것일까? 왜 사람들은 남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할까? 입만 열면 욕하고, 남을 헐뜯고, 험담하고, 악평하는 것이 그리도 재미있는가? 성경에는 분명 형제를 바보라고 욕하고,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마 5:22) 했는데, 인간들은 본래 남 욕하는 입을 가지고 사는 존재들인가? 욕을 안 하고 살 수는 없는 것인가?”

     

    그런데 그 주간 신앙 모임 가운데 존경하는 목사님으로부터 말씀을 듣고 있었는데, 목사님께서 갑자기 욕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지인즉, “욕은 남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을 탓하지 말고, “에이 못난 놈” 하고 자기 탓을 하라는 것입니다. 무언가 크게 얻어맞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당하신 고난을 되새기는 절기이고, 이번 한 주간을 교회는 고난주간으로 지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을 생각하며, 그 의미를 묵상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의 깊이를 생각해보고, 왜 예수님이 죽으셔야만 했는지, 그리고 예수님의 고난을 보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배신의 고난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의 종류와 그 깊이는 이루 말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다만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당시 예수님께서 당하신 아픔을 조금이라도 느꼈으면 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겪으신 고난은 배신의 고통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은 삼십을 받고 넘겨줄 계획을 이미 가졌습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제자의 도를 깨닫지 못한 채 하나님의 일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마 16:23).

     

    예수님은 제자의 도를 가르치시면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 16:24)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동안 예수님은 제자들과 동거하며 제자의 도를 가르치시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거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병든 자가 예수님을 통해 치유 받음을 보았습니다. 귀신들린 자가 예수님을 만나 회복됨을 보았습니다. 배고픈 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할 때 배부름을 경험하게 된 것을 한 자리에서 보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게 되었고,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서도 큰 기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비로소”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말씀하시며, 그 때가 이르렀다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6장 21절에,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수제자 베드로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마 16:22)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항변하다”라는 “epitimao”라는 단어는 꾸짖고 책망한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은 영광의 그리스도만을 생각했지, 고난의 그리스도는 없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배신자 가룟 유다는 산헤드린의 고위 제사장들을 이끌고, 예수님을 잡고자,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왔습니다. 마지막으로 보인 그 제자의 모습은 위선의 입맞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라”(마 26:56)는 말씀을 하시며, 순순히 그들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주십니다. 이를 보던 제자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스승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였습니다. 가룟 유다뿐 아니라 남은 모든 제자들도 예수님을 버리고 자기의 목숨만을 건지는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아무런 까닭 없이 의도적인 모함에 빠진 상황에서, 제자들은 모두 떠나버렸습니다. “범죄자 중 하나로 취급받는”(사 53:12) 상황에서 제자들의 배신은 그들조차 자신의 스승을 범죄자로 인정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 것이 아닌가요? 예수님의 당하신 비통함과 배신감, 외로움은 가슴을 새까맣게 태우고 녹였을 것입니다.

     

    2. 모함의 고난

    두 번째로 예수님이 느끼셨던 비통함은 자신을 둘러싼 온갖 모함과 거짓말에 대한 괴로움이셨습니다. 본문 59절을 보면, “대제사장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증거를 찾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떤 제사장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고 했다는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이 성전을 헐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미 장사하는 집이 되어버린 성전 중심의 너희 삶을 무너뜨리라는 경고입니다. 이제는 성전을 새롭게 세우시는 예수 중심의 삶을 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본래의 말을 변형시키고, 와전시킴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을 많이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십 년 전 쯤, <우정의 무대> 사회를 보던 뽀빠이 이상용 씨가 ‘심장병 어린이 기금 유용 사건’으로 연예계를 떠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상용 씨는 20년 동안 심장병 어린이 돕기 운동, 결식아동과 소년소녀가장 돕기, 환경미화원 돕기 등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연예인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이미지의 실추를 겪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조사 결과 그를 둘러 싼 온갖 의혹은 무혐의로 들어났습니다. 그러나 한번 손상된 명예는 쉽사리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을 겪으며 이상용 씨는 깊은 좌절감과 정신적인 충격으로 왼쪽 눈이 거의 실명할 정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말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향한 온갖 비난과 수근거림에 침묵하셨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묻는 질문 하나에만은 대답하십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3. 육체의 고난

    예수님이 받으신 육체적 고난은 너무나 수치스럽고 모욕적이라 생각만 해도 마음이 찢어질 듯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로 대제사장과 공회원들에게 심판을 받습니다. 신성모독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갖 비난에 침묵하셨습니다. 마치 “도수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사 53:7) 잠잠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하는 마지막 순간에는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셨을 뿐 아니라 “너희가 나를 심판하고 있지만, 장차 내가 너희를 심판할 심판주로 오겠다”는 엄청난 말씀을 하셨습니다.

     

    대제사장은 사형을 결정하기 전에 투표를 해야했지만, 공식적인 투표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격분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폭행을 합니다.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모욕입니다. 그리고 집단적인 폭행을 행한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의 눈을 가리고 선지자 노릇을 해보라고 하면서, 너를 친자가 누군지 맞춰보라고 희롱하였고, 수많은 욕을 퍼부었다고 했습니다(눅 22:63-65).

     

    마태복음 27장 11절을 보면 예수님이 총독 빌라도 앞에 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자처한 적은 없습니다. 총독이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을 때,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한 말은 정확히 번역하면, “수 레게이스,” “네가 그렇게 말한다,” “그건 네 말이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상대방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유대인의 왕임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그런 정치적인 왕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빌라도는 자신의 결정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군중의 동요가 두려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넘겨줍니다.

     

    마태복음 27장 26절 이하를 보면,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을 채찍질 하고, 옷을 벗깁니다. 로마인들이 쓰던 채찍은 긴 가죽끈 끝에 쇠갈고리를 묶은 것으로 예수님의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등에서 피가 흐르는데, 그 옷을 벗겼습니다. 그들은 홍포를 입히고,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웠습니다. 갈대로 머리를 쳤으니 가시가 머리 속에 박히고 머리에서는 피가 흐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신적, 영적, 육체적 고통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당할 수 없는 최고의 비참함과 수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당시 범죄자들에게 조차 혐오의 대상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살인, 강도 등 중죄인 처형용이었고, 오욕과 공포의 상징이었습니다. 길이가 약 10척이고, 가름대가 3척 반이나 되었다고 하는 십자가를 지고,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된 예수님이 구경꾼들의 욕과 비웃는 소리 속에 올라가고 계셨던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신 비아 돌로로사(슬픔의 길), 약 1천 2백보나 되는 좁은 언덕 길 위로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악의 무게를 담은 십자가를 지시고 보혈을 쏟아 부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수치와 아픔을 우리가 얼마나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4.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목적

    예수님은 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바로 나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욕했습니다. 예수님을 손가락질하고, 모욕했습니다. 침을 뱉고, 때렸으며, 십자가에서 처형당하는 중한 고통을 보며 기뻐했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지를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것이 남의 탓이라고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욕을 먹고, 모욕을 당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은 예수님이 아니고 바로 나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 인류의 모습은 각자 자기들이 원하는 바대로 살았고, 하나님을 떠난 삶이었고, 하나님을 더 이상 찾지도 않는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타락한 인류에게 보내신 하나님의 마지막 최고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인간 스스로의 의를 찾을 수 없었고, 그런 모든 인류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이제 십자가 외엔 더 이상의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이 길은 일방적이고, 배타적인 길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베푸신 최고의, 최선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고후 5:21)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있던 한 강도는 죽음의 순간 예수님에게 구원을 요청했고(눅 23:42), 구원의 은혜를 받았습니다(눅 23:43). 그 강도는 죽음의 순간 함께 죽어가는 한 사람에게 자신의 영혼을 부탁합니다. 우리는 이 강도가 죽기 전에 받은 구원에 대해 부끄럽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예수를 조롱하는 가운데, 자신의 영혼에도 어둠이 드리워지는 가운데, 이 사람은 예수에게서 구원의 빛을 보았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5.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정신적, 영적, 육체적 고난을 당하신 주님을 보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입니다. 그것은 우리도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흔적을 지니고(갈 6:17), 예수님을 닮아가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오라” 하신 말씀은 고난의 길을 통과하며, 고난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입니다. 고난 없이 영광이 없고, 죽음 없이 부활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보여주신 사랑은 마지막까지 자신을 죽이는 자들까지도 용서하시는 사랑이었습니다(눅 23:34). 예수님은 행악자, 원수까지도 사랑하시며, 그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우리는 인류에게 위대한 교훈을 남긴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다시 한번 기억하길 바랍니다. 인류에게 감동을 주고, 희망을 주고, 명언을 남긴 사람은 많지만, 온 인류를 위해 목숨을 버린 사람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육체적인 고통뿐 아니라 인격적인 모욕과 수치, 정신적인 충격도 당하셨습니다. 또한 아버지께 버림받는 비통함까지도 경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은 이미 겟세마네에서 죽으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온 인류의 죄가 담긴 잔을 드시며 그 마음은 이미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님의 모습이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이 진리 앞에서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기억하며 감사함은 마땅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없었다면 우리는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받았음을 감사하고, 어떠한 고난이 있어도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하는”(고전 1:23)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입니다. 이 복음을 믿고 구원을 얻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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