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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정한 관계의 회복
    교회력에 따른 본문 중심 설교 2010. 10. 20. 00:36

    성령강림절 제20주일[20101010]

     

    진정한 관계의 회복(눅 17:11-19)

     

    1973년도에 나왔던 올드팝 중에 토니 올랜도 앤 돈이 부른 “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d oak tree”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노래 속의 주인공은 삼 년이라는 형기를 마치고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지금 그의 마음은 마냥 기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애인이 자기를 기다려줄 것인지 아직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에게 편지 쓰기를 “내가 돌아가는 날 당신이 만약 나를 맞아준다면 오래된 오크 나무에 노란색 리본을 달아 주세요.”

     

    주인공은 차마 볼 수 없어 버스 기사님께 대신 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과연 오크 나무에는 노란색 리본이 달려있었을까요? ... 버스 전체에 환호성이 울립니다. 백 개의 노란 리본이 그를 환영하고 있었으니까요. 저는 이 가사가 마치 죄인인 우리가 아버지 품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을 주는 것으로 들립니다. 예수님은 수 백 개의 환영 현수막을 달아놓으시고 죄인인 우리를 맞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뿐만 아니라 사람들과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시키시고 건강한 관계를 맺으시길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나병환자들의 부르짖는 소리에 긍휼한 마음으로 응답하고 계십니다.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나병환자들은 마을 밖에서 살았습니다. 다시 말해 나병환자들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절실히 필요한 사귐이 끊어진 상태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입니까? 가장의 실직, 가족 구성원 한 사람의 중병 선고, 회사의 부도, 가정 경제의 위기... 과연 그런 것들이 우리를 힘들게하고 지치게하고 삶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원인입니까?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간접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진짜 이유는 이러한 위기들이 왔을 때 경험하게 되는 인관 관계의 단절에서 비롯됩니다. 가족이 떠나고, 친구들이 등 돌리고, 사랑한다는 배우자마저 포기하는 일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자기 주변에 위로해주고 돕고 격려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버려진 채 나 혼자 남은 상태라고 느껴지는 순간 절망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레위기에서 나병에 걸린 사람은 부정하다 하여 공동체 밖으로 내쫓으라고 하는 규례에서 보는 것처럼 나병환자의 괴로움은 사람들에게 버려진 상태에서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2장 18절 말씀에,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또 창세기 2장 24절에는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은 단지 남자와 여자가 서로 돕고 하나 되어 한 가정을 이루라는 뜻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 자녀라면 한 몸 공동체를 이루라는 뜻도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누가 병들었다고 공동체 밖으로 내쫓지말고 병 낫기를 위해 서로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죄를 지으면 무조건 숨기면서 거짓말하지 말고 죄를 서로 고백하고 기도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공동체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혼자 있게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 회복을 이루시길 원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불쌍히 여겨달라”는 나병환자들의 간청에, 낫게 해주실 거면 즉시 낫게 해주실 수도 있는데, 무슨 이유로 먼저 가라고 하시고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믿음을 보고자 하신 것입니다. 참 믿음(피스티스)은 순종(피스토스)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4절입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들은 믿음으로 순종하였더니 나병이 깨끗해지는 육적인 치유를 받았습니다.

     

    열 사람 중에 아홉은 아마도 제사장에게로 갔을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다고 보여지진 않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 사마리아인은 자신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가던 길에서 다시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드렸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다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표현은 아홉이 어디 있는지 궁금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아홉이 유대인임을 말하고자 하는 누가의 의도가 숨어있습니다. 예수님께 감사드린 사람은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으로 누가는 복음이 이방인에게도 전파되어가는 모습을 나타내고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오늘은 그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19절,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나병이 치유된 것 말고 사마리아인은 어떤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까? 바로 그의 믿음으로 죄 사함의 구원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나병에 걸린 사마리아인이 나병뿐만 아니라 죄로부터의 구원도 받은 것은 구원이 단지 질병의 치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의 근본 문제를 해결받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구원이란 병의 치료로 단절됐던 인간 관계가 회복되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그것이 더 중요한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육적인 감각이 회복된 것으로 기뻐하여 이제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고, 먹고 싶은 음식 마음껏 먹게 하기 위해 예수님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육적인 감각뿐 아니라 영적 나병에 걸린 우리의 영적인 질병도 치유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도 온전히 회복시키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영적 감각이 회복 된 사마리아 사람에게 나타난 믿음의 표현이 감사입니다. ‘감사드리다’라는 ‘유카리스테오’가 곧 예배를 뜻하는 말입니다. 시편 50편 23절 말씀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오늘날 영적 나병에 걸린 사람은 누구입니까? 감사가 없는 사람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형식적인 예배와 기도는 하지만 육적인 복, 건강, 물질, 사업의 복을 구하며 진정한 감사의 제사는 없는 사람입니다.


    영적 감각이 회복된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예배로, 찬양으로, 헌신으로 진정한 감사가 표현됩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영과 육의 감각이 회복되길 원합니다. 영과 육의 구원을 이루어나가 하나님과 사람과의 진정한 관계의 회복이 일어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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