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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국 갈 준비를 하고 있는가?
    교회력에 따른 본문 중심 설교 2012. 3. 4. 08:38

    사순절 둘째 주일[20120304]

    천국 갈 준비를 하고 있는가?(눅 16:19-31)


    사순절 둘째 주일 주님의 전에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성도님들에게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임하시길 빕니다. 오
    늘은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사순절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는 귀한 시간을 갖길 원합니다.

    저는 이번 주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이 안에 예수님이 전하시고자 하는 깊은 영적인 메시지가 숨어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도 지난 주일 선포하였던 창세기 22장의 말씀과 같이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말하는
    ‘신앙’이란 한 마디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행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어떤 국가나 종교의 지도자가 된다면 그것만큼 위험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 지도자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한 민족을 말살하기까지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여 자신을 우상화하고, 그런 과정에서 사상과 교리를 절대시하도록 만들게도 합니다.

    한 사람 뿐만 아니라 한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정신세계와 영적인 세계가 잘못된 사상과 교리 또는 자신이 경험한 가치관 안에 갇혀있으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이 이루고 싶은 것이 곧 옳은 일이라고 판단하게 되는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길로 가지 않기 위해서 시편 기자와 같은 기도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소서.”(시 119:37)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

    베드로가 “성경의 모든 예언을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라”고 한 말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성경은 성령님께서 열어주셔야만 하나님의 뜻을 깨닫도록 인도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상태로 사는 사람은 그 인생의 종착역이 지옥입니다. 그러한 사람의 예로 예수님께서 언급하는 사람이 바로 본문에 나오는 ‘한 부자’입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는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 설교가 우리 인생의 방향을 지옥에서 돌이켜 천국으로 향할 수 있게 하는 신앙생활에 큰 전환점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설교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핵심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을 오해하고 잘못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본문은 단순히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중요한 어떤 메시지를 말씀하시고자 천국과 지옥을 배경으로 하는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전개할 뿐입니다. 물론 천국과 지옥은 실재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가고, 어떻게 하면 지옥에 간다는 그런 문자적인 메시지는 없습니다.

    본문을 묵상하면 예수님이 강조하는 메시지가 한 등장인물을 통해 투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사후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기 전 등장인물은 두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부자와 나사로입니다. 이 중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하시고자 하는 대상으로 삼은 인물 곧 본문의 주인공은 '한 부자'입니다.

    이 부자가 어떻게 살았는지 본문 19장 1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리고 또 다른 등장인물 나사로가 어떠한 사람이고 어떤 상태인지를 이어서 설명합니다.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눅 16:21~22)

    예수님은 '나사로'라고 하는 몸에 성한 구석이라고는 없는 거의 죽게 된 거지가 그 부자의 ‘대문 앞’에 놓여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거지가 부자의 집 대문 앞 그 자리에 있게 된 것이 본인이 원했거나 원치 안했거나 그리고 거지의 집이 땅바닥이든 어쨌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핵심은 이 둘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를 독자들에게 묻고 싶으신 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관계는 바로 옆 집에 사는 이웃 관계입니다. 올라가 그 조상을 보면 결국 한 형제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본문의 결론이 우리 눈에 보다 선명히 들어오게 되리라 믿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표면적인 뜻은 부자가 나사로를 보고 굶어 죽어가는 데도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상처 난 데를 보고도 치료해주고 도와주지 않아서 결국은 부자는 지옥 갔다는 말입니다.(마 25:45)

    분명한 것은 오늘의 본문은 ‘이 부자에게 주는 경고의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부자가 죽어서 간 지옥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그 장소가 “불꽃 가운데”라는 표현에 다 담겨있습니다. 지옥은 정말 가서는 안됩니다. 불 속에서 영원히 살고 싶은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지옥은 원래 사탄, 마귀들을 위해 예비된 곳이지 사람이 갈 곳이 아닙니다.(마 25:41) 그럼에도 '본문의 부자처럼 산다면 추수 때 가라지를 불사르는 것처럼 그 사람은 반드시 지옥 가게 된다'라는 것이 예수님의 경고의 메시지입니다.(마 13:30, 계 14:19)

    본문에서는 지옥에 간 부자와 천국에 있는 아브라함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찌 지옥에 있는 자와 천국에 있는 자가 실제로 대화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지옥에는 더 이상 회개의 기회와 자비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부자와 아브라함이 대화를 나누는 것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화 내용을 통해 이 부자의 불신앙에 경고를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본문에서 말하는 이 부자는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여기서 부자와 거지는 단순히 돈이 많고 적은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맥상 예수님은 본문 바로 앞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을 보면서 그들이 들으라고 이 비유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보다 돈을 더 좋아하고(눅 16:14), 사람들 앞에 인정받기를 좋아하고, 사람 중에 높임 받기를 좋아하는 자들입니다.(눅 16:15) 결국 이들에게 율법은 자신을 드러내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이용하는 수단이고 도구일 뿐입니다.(출 20:7, 딤전 6:5)

    이러한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근본정신을 모르면서 율법을 지키고 산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근본정신을 모른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그 정신세계가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정신세계는 사람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으로 상대를 판단하며 사는 것입니다.

    반면 눈이 열려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법의 놀라운 일들을 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 볼 수 있습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때 하나님의 손길이 닿지 않은 피조 세계가 하나도 없고, 그 안에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작품이고(엡 2:10), 결국 너와 내가 연결된 존재라는 사실까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갈 5:14)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계명의 근본 정신을 모르는 바리새인들에게 이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선포하면서,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이 이같은 부자라고 비유하시고, 이방인을 거지 나사로로 비유하여 설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리새인 같은 이스라엘 보고 ‘지옥 가지 않으려면 정신차려라’라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통해 궁극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살기를 촉구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탈출시킨 목적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19장에는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전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언약 백성, 모든 민족 중에 보배로운 백성, 특별히 구분된 거룩한 백성으로 택하신 이유는 열방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로 삼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출 19:5~6) 한 마디로 하나님을 섬기는(예배 드리는) 백성, 만국 중 제사장 역할을 하는 하나님 백성 삼고자 하신 것입니다.(출 3:12, 출 5:1, 출 12:31)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로서의 그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하고 불순종과 교만으로 하나님을 떠나기 일쑤였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을 한탄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가장 잘 나타난 곳이 이사야 5장의 포도원 노래입니다.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서 사리를 판단하라.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사 5:3~4, 7)

    “한 부자가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라는 말씀의 영적 의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여 복과 은혜를 특별하게 부어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선민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도우시고 보호하셨다는 사실을 잊고 또한 계속해서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선지자들의 외침도 거절한 채 우상 숭배와 자기 욕심만 채우며 살았습니다.(호 14:1, 욜 2:13, 슥 1:3)

    하나님이 택하신 제사장 나라 이스라엘이 열방을 비추는 구원의 빛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자 거지 나사로는 그 은혜의 부스러기조차 얻어먹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는 모습을 본문은 그리고 있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이스라엘을 통해 출애굽의 하나님을 알고, 언약의 복음을 듣고 함께 구원 받아야할 이방인인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이방인이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하여 구원받은 여러 사건들이 나옵니다. 그 옛날 이방인이었던 나아만 장군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순종하여 나병에서 고침 받았습니다.(왕하 5:14)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기생 라합은 여호수아의 군사들을 도와주어 구원을 받았습니다.(수 6:25) 이방 여인 룻은 보아스의 사랑을 받아 기업을 얻게 됩니다.(룻 3:9) 이들은 다 이방인이지만 구원의 빛을 본 사람들입니다.

    복음서에는 이방 여인의 간구를 들어준 예수님의 행적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어떤 가나안 여인이 와서 자기의 딸이 귀신 들렸는데 고쳐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에는 거절 했지만 개같은 이방인도 은혜 받기를 원한다고 호소하는 이 이방 여인의 믿음을 보고 그 딸을 낫게 해주셨습니다.(마 15:27, 막 7:28)

    부자의 상에 차려진 기름진 음식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부어준 구원의 축복, 언약의 복음을 상징합니다. 이것을 나눔으로 이방인도 구원 받길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영적인 축복을 먼저 받은 자가 그것을 이웃이고 형제인 이방인과 나누지 못한다면 이 부자처럼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경고하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선민의식이라는 영적 교만이 그들을 율법을 알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었습니다.(눅 10:27) 택함 받았다는 영적 우월의식이 그들을 사람들에게 높임 받기를 좋아하는 율법주의 바리새인들로 만들었습니다.(눅 18:11)

    나사로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도우셨다’라는 뜻으로 누가는 이방인도 유대인과 같이 동일하게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자들이라는 진리를 우리에게 말하고자 합니다. 누가는 누가복음을 시작하며 시므온의 입을 통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선포하며 찬송합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눅 2:30, 32)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줍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상숭배하고 타락한 이스라엘에게 호세아가 외쳤던 것처럼 “힘써 하나님을 아는 일”이 필요합니다.(호 6:3) 하나님을 알아야 하나님의 뜻하신 바를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구원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사실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일깨웁니다.(엡 2:8) 그러면서 구원은 자랑할 것이 아니고, 구원의 목적이 있는데 곧 선한 일을 행하라고 부르셨다고 말씀하십니다.(엡 2:10) 진정한 영적인 부자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은혜를 나누는 사람입니다. 

    선한 일이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롬 12:2) 우리가 먼저 구원받은 것은 내가 가진 복음 나누라고 주신 사명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물질의 복은 죽어가는 영혼 돌보고, 살리라고 베푸신 은혜입니다. 이 진리를 깨닫고 사는 영혼이야말로 반석 위에 천국의 기초가 세워져가는 영혼입니다.

    반면 먼저 구원 받고 먼저 복 받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도 모르고, 하나님 알기를 거절하며 사는 인생은 그 대가가 무시무시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호세아 4장 6절에서 선지자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고 하며 탄식합니다. 여기서 ‘지식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 알기를 거부한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히 6:5~6)

    인생은 하나님이 주신 단 한 번의 천국 가는 기회입니다. 만약에 모든 인생에게 두 번의 기회가 주어졌다면, 예수님께서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시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요 3:7) 우리에게 주신 인생은 하나님의 선물이자 천국 가는 단 한 번의 준비의 시간입니다.

    아무리 고난의 터널이 길어도 인생의 길이보다는 짧다는 욥기의 교훈은 천국 가는 자녀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의 잠언이 될 것입니다.(욥 42:12) 우리 모두 하나님이 주신 하나뿐인 인생의 기회를 천국 갈 준비의 시간으로 만들어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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