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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후 구원에 이르도록 부단히 힘써라.
    교회력에 따른 본문 중심 설교 2015. 5. 31. 07:00

     

    성령강림후 첫째주일·삼위일체주일(2015년 5월 31일)

    마태복음 22장 8-14절

     

    최후 구원에 이르도록 부단히 힘써라.

     

     

    가. 구원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습니다.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 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9-10절)

     

    예수님은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에 대한 주제로 세 가지 비유 설교를 하셨습니다. 두 아들 비유를 통해서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들어간다’고 가르쳐주었습니다(마21:31). 다음으로 포도원 농부 비유에서는 ‘열매 맺는 자가 들어간다’고 선포하였습니다(마21:43).

     

    본문은 이와 같은 의도에서의 혼인 잔치 비유로 ‘예복 입은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본문 앞의 1~7절 이야기는 혼인 잔치를 준비한 임금이 종들을 보내어 초청하기로 되어있던 사람들을 불렀지만 그들의 반응은 거부했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처음 청한 사람들이 거절하자 임금은 광장에 나가 만나는 사람들 모두를 혼인 잔치에 청하도록 종들에게 명했습니다. 9절에 ‘만나는 대로’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비유는 구원의 문이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다는 메시지를 줍니다.

     

    또한 10절에 보면 ‘나가’(엑세르코마이)라는 동사가 부정과거 분사형으로 쓰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하나님의 보편적인 은혜는 유대인과 이방인, 의인과 악인의 차별 없이 모두에게 미칩니다(마5:45). 바울도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라고 하였습니다(딤전2:4). 하나님은 지금도 만민을 구원의 여정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나. 구원의 여정에서 한눈팔거나 안주하면 위험합니다.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8절)

     

    임금은 처음 초청한 사람들이 혼인 잔치 자리에 참여하기에 합당하지 아니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이라 자부하던 이스라엘에게 주는 경고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여기면서도 하나님의 뜻에서는 멀어졌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천국에 들어오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본문을 통해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이 합당하지 않다고 하였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3절에 보면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고 하였는데 오기를 싫어하였다고 했습니다. 5절에는 사람들이 종들의 외침에 돌아보지도 않고, 이런 저런 핑계를 대기만 했습니다. 심지어 종들을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6절).

     

    오늘날의 상황으로 보면 먼저 믿은 사람이 계속해서 은혜 받기를 게을리 하는 모습입니다(고후6:1). 즉 은혜를 거부하고, 관심조차 갖지 않는 사람들을 일컫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형식적이고 내면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매인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마20:16). 다른 사람 보다 먼저 믿었다는 것은 결코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더욱이 구원의 여정에서 한눈팔거나 안주해서는 위험합니다.

     

    다. 최후 구원에 이르도록 부단히 힘써야 합니다.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11-12절)

     

    본문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는 임금이 혼인 잔치에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발견하고는 바깥 어두운 데로 쫓아내는 장면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우리가 예복을 입고 있어야만 한다는 진리를 깨닫게 합니다.

     

    물론 우리는 모든 비유에서처럼 본문에서도 그 의도에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 온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실제 천국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아닙니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도 천국과 지옥 사이에서 실제로 대화가 오고갈 수는 없지만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그렇게 설정한 것입니다.

     

    본문 비유의 핵심은 결혼 예복을 입어야만 천국 잔치에 들어올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결혼 예복이 무엇인지가 중요한 메시지라 볼 수 있습니다. 우선 본문에 ‘옷을 입다’(엔뒤오)는 동사를 보면 문법적으로 완료형 분사 중간태로 쓰였습니다. 이는 옷을 입은 상태가 완벽하고 계속적이라는 뜻을 나타냅니다. 또한 중간태로 쓰였다는 것은 저절로 입혀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입으려고 부지런히 애써야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혼 예복은 예수님을 믿고 얻는 죄 용서함의 칭의가 아니라 칭의의 의(imputation) 이후에 성령을 따라 행하는 성화의 의(impartation)를 말합니다. 실제로 내 삶에 성령님의 일하심으로 인격이 변하고 은사의 능력이 나타나는 거룩함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내가 거듭나는 상태입니다(벧전1:23). 바울의 고백처럼 스스로 내 몸을 쳐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자 하는 모습입니다(고전9:27).

     

    라. 성령 충만한 믿음으로 최후 구원에 이릅니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13-14절)

     

    예수님은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는 말씀으로 이 비유의 의도를 드러내셨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총 6번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는 마지막 심판 때에 천국에 들어오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들의 결과로써 모두 행함과 관련해서 쓰였습니다.

     

    최후 심판 때 영생의 조건은 성화의 믿음 곧 거룩함에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이 거룩함의 옷을 입어야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설 수 있습니다. 바울도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강조했는데 본문과 같은 동사(엔뒤오)에 부정과거 명령형 중간태로 쓰였습니다(롬13:14). 역시 우리 스스로 부단히 힘써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사도 요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자가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는다”고 하였습니다(계19:8). 이는 거룩하고 정결한 삶을 인정받은 성도가 입게 되는 의의 옷입니다.

     

    구원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최후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에는 어떠한 조건도 없습니다. 그러나 뽑을 때에는 명백한 조건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벌거벗은 실체는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죄인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의 공로를 통해 칭의의 옷을 입히시고, 성령을 따라 행하며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십니다(롬8:4).

     

    우리가 무슨 수로 거룩한 옷을 입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성령 충만한 믿음뿐입니다. 하나님께서 합당하다고 뽑으시는 순간을 위해 끝까지 성화의 과정을 이루어나가는 성도는 영광스런 최후 구원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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