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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성된 주님의 용사가 되라.
    교회력에 따른 본문 중심 설교 2013. 6. 24. 01:00

     

    성령강림절 후 다섯째 주일[20130623]

     

    충성된 주님의 용사가 되라(대상 11:15-19)

     

     

    성경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오지만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산 인생들이 있고, 하나님을 반역한 인생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을 증거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롬 15:4).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여러 동역자들의 이름을 기록하였습니다. 그중에서도 브리스가와 아굴라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생명을 무릅쓰고 교회를 세우는 일에 함께한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롬 16:4).

     

    반면 가룟 유다같은 사람은 은 삼십을 받고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팔아 넘긴 사람입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그를 예수를 따르다가 배신한 자로 기억하고 있습니다(마 26:15).

     

    이렇듯 성경은 두기고처럼 하나님의 신실한 일꾼으로 살 것인지(골 4:7) 아니면 데마(딤후 4:10)나 알렉산더(딤후 4:14)처럼 복음 사역의 방해꾼으로 살 것인지 우리의 선택과 결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신 30:19).

     

    본문에 나오는 세 사람은 어떻습니까? 19절에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라는 말로 그들의 용기 있는 믿음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성경이 칭찬하고 있는 세 용사의 무용담을 통해 다윗을 향한 그들의 헌신이 보여주는 오늘의 교훈을 생각해 봅니다.

     

    이전에 다윗은 사울을 피해 아둘람 굴로 몸을 피한 적이 있습니다. 사무엘상을 보면 이때 환난 당한 자들, 빚진 자들, 마음이 원통한 자들 사백 명 가량이 다윗 주변으로 모였다고 말합니다(삼상 22:2).

     

    다윗과 그를 따르는 군대는 블레셋의 봉신으로 들어가 시글락이라는 한 지역의 수비를 담당하며 살았습니다. 다윗은 고향을 떠나 가드 왕 아기스의 수하 신세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도 다윗의 군대를 보호하시고 견고하게 성장시키십니다.

     

    본문의 배경은 사울 왕이 블레셋의 손에 죽고(대상 10장)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면서(대상 11:3) 블레셋을 물리치고 영토를 회복하는 과정 가운데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다윗이 블레셋에 빼앗긴 영토를 되찾으며 이스라엘 왕국을 세울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역대상 11장 9절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다윗 왕조는 견고하게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고통의 시간들을 보내며 연단 받았고, 그를 따르는 하층민까지도 연합하면서 강한 군대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역대상 11장과 12장에는 다윗을 도운 많은 용사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에게는 목숨까지도 아끼지 아니하는 충성스런 용사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들을 붙여주셔서 왕국을 세울 수 있도록 도우신 것입니다.

     

    이제 본문에서 증언하는 세 용사의 행적이 어떠한 지 살펴봅니다. 먼저 세 용사와 관련해서 사무엘하 23장에서는 요셉밧세벳, 엘르아살 그리고 삼마라는 이름이 병행 본문 앞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역대상 11장에는 본문 뒤에 아비새와 브나야라는 용사의 이름이 나옵니다. 하지만 본문에 나오는 세 용사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언급하는 표현이 없어서 본문의 세 용사가 누구라고 단정지어 그 이름을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분명한 것은 삼십 명의 지휘관 가운데 세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십 우두머리 중 세 사람이 바위로 내려가서 아둘람 굴 다윗에게 이를 때에 블레셋 군대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 쳤더라. 그 때에 다윗은 산성에 있고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은 베들레헴에 있는지라.”(15-16절)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이지만 지금은 블레셋이 점령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삼십 세에 왕위에 올랐으니(삼하 5:4) 어림잡아 십 몇 년을 유랑하고 있는 셈입니다.

     

    “다윗이 갈망하여 이르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꼬 하매”(17절) 다윗은 그 마음에 추수철의 목마름을 적셔주던 옛날 고향 땅의 샘물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왔습니다. 향수병은 아니라도 다윗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윗 밑에는 삼십 명의 지휘관이 있었는데 이때 세 사람이 다윗의 소원을 듣고 결단합니다. 세 용사는 죽음을 각오하고 블레셋의 진영에 들어가 우물 물을 담아옵니다. 아둘람에서 베들레헴까지 약 20km나 되는 거리를 갔다 돌아온 것입니다.

     

    다윗은 이 물을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를 위해 목숨을 걸고 구해 온 용사들의 피와 같은 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믿고 따른 이런 귀한 용사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 물을 전제(奠祭)로 하나님께 드린 제물에 부어드립니다(18절).

     

    다윗에게는 이런 충성된 용사들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이런 용사들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았기 때문에 도피 생활 중에도 시편으로 찬양하며, 전장 가운데서도 예배를 드리는 영성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다윗에게 충성을 바치고 헌신한 세 용사의 모습이 하나님 나라와 주님의 일을 하는 우리에게 어떤 모범을 보이고 있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본문은 세 용사처럼 우리도 주님의 일에 민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17절을 보면 “다윗이 갈망하여 이르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꼬?”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의 소원을 세 사람만 들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 사람은 왕의 소원을 듣자 자신들이 이 일을 감당해야겠다는 사명감을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민감하게 알아 흡족하게 해 드리는 사람입니다. 다윗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다윗을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인정합니다(행 13:22).

     

    이사야는 환상 가운데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물어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사야 보고 직접적으로 가라고 하신 것은 아니지만 이사야의 자발적인 결단을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사야가 대답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

     

    어떤 이들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인지 알면서도(막 3:3) 막상 교회 안에서 사람을 죽이는 일을 버젓이 하고 있습니다. 정의와 공의가 하나님의 뜻인 줄 알면서도(잠 21:3)  기득권이 두려워 불의를 저지르는 일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라고 하였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는다면 사람의 일을 먼저 떠올리고(마 16:23) 사람들의 평가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사람은(마 6:33) 하나님의 뜻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기록된 말씀으로 우리에게 알려주셨고,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기도하는 가운데에서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밤이 새도록 하나님의 뜻을 구하였습니다(눅 6:12).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민첩하게 준행하면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두 번째로 세 용사에게는 한계 상황을 뛰어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19절을 보면 다윗은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이 사람들의 피를 어찌 마시리이까 하고 그들이 자기 생명도 돌보지 아니하고 이것을 가져왔으므로 그것을 마시기를 원하지 아니하니라.” 하였습니다.

     

    세 용사는 다윗의 마음을 민감하게 알아차리고 결단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용사들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담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18절에 “이 세 사람이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돌파하고 지나가서”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돌파하고’라고 쓰인 ‘바카’라는 말은 ‘뚫고 들어가 정면 승부를 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유대 땅 베들레헴은 지금 블레셋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블레셋의 진영을 뚫고 들어가 우물 물을 길러온다는 것은 아무리 용감한 부하라도 선뜻 생각할 수 없는 담대함이 요구됩니다.

     

    세 용사에게는 어려움을 돌파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블레셋의 진영이라는 한계 상황을 정면 돌파로 극복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서도 우리는 이런 한계 상황에 부딪칠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신앙의 한계를 극복한 믿음의 사람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죽을 각오를 하고 군중 사이를 뚫고 들어갔습니다(막 5:27). 한 중풍병자를 침상 채 메고 온 친구들은 무리 때문에 예수님께 갈 수 없게 되자 지붕을 뚫고 들어갔습니다(눅 5:19).

     

    사도 바울도 주님께 받은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 생명조차 아끼지 아니하였다고 고백합니다(행 20:24). 다윗의 세 용사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상황이 주는 한계를 뛰어넘고, 상식이 주는 고정관념도 뛰어넘는 믿음에 대한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세 용사처럼 우리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충성과 헌신이 있어야합니다.

     

    다윗의 마음을 민감하게 알아차린 세 사람은 자신들의 결단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수행하였습니다. 만약 세 용사가 다윗에게 보고하고 이런 일을 감행하려 했다면 다윗은 허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충성하는 부하들이 있다는 것은 어떤 면으로 보면 다윗의 인격과 리더십이 부하들의 충성과 용맹을 이끌어 내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용장 밑에 졸장 없는 법을 보게 됩니다.

     

    지금 세 용사는 자신들의 충성심을 보이고자 적진으로 들어가 베들레헴 샘물을 길어온 것이 아닙니다. 다윗을 사랑하고 충성하는 마음에서 은밀하게 모험을 감행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충성을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전 12:14). 신실한 일꾼을 하나님이 기억하시며 정직한 종을 하나님이 인정하십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외식하는 행위를 비판하셨습니다(마 23:28). 그들은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종교 행위를 하였습니다(마 23:5). 기도 행위를 자기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사용하였습니다(눅 18:11).

     

    세 사람이 충성된 다윗의 용사로 우리에게 기억되듯이 우리도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다하고 이름 없이도 주님의 사역에 동참하면(막 15:41) 하나님은 반드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하시며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마 25:21).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에 민첩하게 순종하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응답하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어려움도 돌파하며 한계 상황도 극복하는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주님의 일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성실히 맡겨진 사명에 충성하는 자에게 영생의 복을 약속하십니다(막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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