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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풍요로운 삶을 누리려면
    교회력에 따른 본문 중심 설교 2008. 10. 23. 17:39

    성령강림절 후 스물네번째 주일[20081019]

     

    풍요로운 삶을 누리려면(마 5:6)

     

    기독교 역사에서 보면 기독교가 성장하고, 기독교 정신과 문화가 한 나라를 지배하던 그런 때도 있었고, 외형적으로 교회는 세워지고 기독교라는 이름이 난무함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정신은 오히려 약해지고, 기독교 문화는 세상의 음란한 문화에 섞여 겉모양만 기독교, 형식만 기독교인 때도 있었습니다.

     

    기독교 세계가 암울하고, 기독교 문화가 음란에 젖은 때는 언제였는가? 한번 생각해 볼 때, 그것은 교회 안에 예수가 없고, 기독교를 성경의 예수가 아닌 사람들이 만들어낸 예수로 포장할 때였다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정신은 간 데 없고, 권력 다툼, 부의 축적만이 실제적인 개인과 집단의 유일한 목적으로 남아있을 때, 기독교는 희망을 잃게 됩니다. 기독교가 세속화되고, 기복주의만을 추구할 때, 기독교는 어두운 그림자만 드리운 채 다수의 힘없는 사람만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기독교는 과연 어떠합니까? 기독교가 세상을 변화시키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고 있는 것입니까?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해답은 하나밖엔 없습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기독교 역사가 보여주는 교훈을 보면,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회복됨으로 타락한 기독교가 새롭게 살아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16세기 종교개혁 시대가 그랬고, 18세기 영국의 부흥운동 시대가 그랬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산상수훈으로 돌아가서 말씀에 순종하고, 기도하면, 예수님이 살아있는 기독교, 예수님이 살아계신 교회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세속화된 기독교, 기복주의의 기독교는 무엇이 문제입니까? 성경이 가르치는 복을 잘못 가르치고, 이해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는 팔복의 복이 진짜 복인줄 알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말씀하시는 복이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천국을 얻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끝나고, 육체의 소멸과 함께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 곧 재물과 명예, 지식, 성공 등 이 모든 것도 죽음과 함께 끝나버린다면 그런 소유가 진정한 복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 업적이 죽음과 함께 사라진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런 것들을 추구한들 육체의 소멸과 함께 모든 것이 끝난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육체의 죽음과 함께 사라진다면 분명 그것은 허무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많은 사람이 허무를 진짜라고 착각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 인생들에게 가장 필요하고도 중요한 한 말씀을 하십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천국이라는 영원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영원한 나라에 대해서 가르치셨으며, 이 세상에서 천국을 누리는 것이 참 행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출세가 최고의 복이 아니라 천국을 소유함이 최고의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천국은 어떻게 누릴 수 있는가?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마음을 가져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이 깃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에겐 천국이 깃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욕심이 가득한 사람, 부자가 돼서 떵떵거리며 살아보겠다는 사람, 박사학위 따고 교수돼서 편하게 남은 인생 살아보겠다는 사람, 이런 사람들에겐 행복이 깃들지 않는 것입니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

    우리는 맑은 슬픔을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부터 일그러진 나의 모습을 보고 슬퍼해야 합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성품이 없음을 보고 애통해야 합니다.

     

    왜 사람들이 안웁니까? 자신이 하는 일이 죄인줄 모르기 때문에 안웁니다. 사람들에게 상처주고, 사람들을 미워하고, 하나님이 주신 시간, 재물을 헛되게 쓰는 일이 죄인줄 모르기 때문에 안웁니다.

     

    우리는 울 일이 너무 많습니다. 온유한 성품을 만들어가지 못하는 나를 보고, 지구 저 편에 하루 1달러가 없어 죽어가는 생명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나를 보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존재로 살아가지 못하는 부족한 나를 보고 눈물을 쏟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슬픈 일이 많지만 슬퍼할 때 슬퍼할 줄 알면 하늘의 위로가 임한다 그랬습니다. 비가 다 내리고 나면 하늘이 맑듯이, 슬퍼할 것을 슬퍼하면 참으로 맑게 갠 날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주님은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성품은 물과 같은 이미지입니다. 물은 중간에 막히면 돌아갈 줄 압니다. 막히면 기다릴 줄 압니다. 그러다 자신이 가야할 길을 알고 갑니다. 부드러운 물이 결국 지구의 사분의 삼을 차지한 것입니다.

     

    시편 말씀에 악을 행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을 누린다고 약속합니다. 온유한 자에게 하늘의 평안이 충만히 임하는 것입니다.

     

    천국의 행복, 그 네 번째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디카이오스)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란?

    1.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삶의 방향을 정하는 사람입니다.

    의로운 사람이란 하나님의 뜻에 내 뜻을 맞추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나를 다스리기를 구하는 사람입니다. 문자적 율법주의자가 아닌 법을 초월한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는 사람입니다.

     

    마태는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묘사합니다. 문자적 계명을 준수한다고 그 사람이 의로운 것이 아닙니다. 요셉은 계명의 한계를 뛰어넘어 다른 사람들에게 올바른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마음에 이미 정의로운 질서를 창조하셨습니다. 율법은 오히려 그 질서를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계명의 한계를 넘어서 하나님의 공의, 자비가 우리를 다스린다면 진정한 자유와 행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란 하나님의 의 외에는 선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만 바라는 사람입니다. 허탄한 일에 뜻을 두지 않는 사람입니다(시 24:4).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때,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기쁨이 임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 때 구원의 은혜가 임하고, 복음의 능력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2.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주님을 닮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란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자를 말합니다. 특별히 거룩한 성품, 진실한 성품, 정직한 성품을 말합니다. 이러한 성품을 날마다 추구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작은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크신 뜻에 순종함으로 우리는 실질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덧입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서 의를 인정받는 삶이란 이 세상에 살지만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도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사람입니다.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에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지금까지 잘못 살아왔더라도 나의 육체의 연약함을 애통해 하며, 하나님 앞에 어제 보다는 더 나은 새로운 모습으로 서는 것, 그것이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의입니다.

     

    요셉은 주인 마님의 유혹에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요셉이 여인의 유혹을 넘어설 수 있었던 것은 평상시에도 하나님 앞에 진실한 삶을 살았던 까닭입니다.

     

    다니엘도 하나님의 율법 앞에 정직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모함 속에서도 하나님을 버리지 않고 동일하게 하루 세 번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에이브라함 링컨은 남은 돈 6센트를 돌려주러 늦은 밤 가게 문을 닫고 앤디 할머니 댁으로 달려갔습니다. 청년 링컨의 정직 속에 장래 훌륭한 인물이 될 씨앗이 숨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정직하게, 거룩하게 사는 삶, 이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채우십니다.

     

    요셉은 의를 지켰으나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간수장의 눈에 들어와 하나님이 살게 해주셨음을 봅니다. 우리들이 정말 배부르고, 복되고, 훌륭하게 사는 길은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신실하고,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이 땅에서 모든 것이 더해지는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에게서 볼 수 있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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