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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님에게 진 사랑의 빚을 다른 사람에게 갚아야 합니다.
    교회력에 따른 본문 중심 설교 2013. 4. 15. 16:40

    부활절 셋째 주일[20130414]

     

    하나님에게 진 사랑의 빚을 다른 사람에게

    갚아야 합니다(롬 13:8~10)

     

     

    사도 바울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했습니다.(8절)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사랑의 빚'을 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의 은혜도 사랑의 빚이고, 진리를 가르쳐주고 옳은 길로 인도해주신 스승의 은혜도 사랑의 빚입니다. 또한 우리는 무엇보다 가장 큰 사랑의 빚을 지고 삽니다.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의 빚입니다.(요일 4:9)

     

    우리는 이러한 사랑의 빚을 갚을 수 있으면 갚아야만 합니다. 하지만 실제 사랑의 빚을 다 갚을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 부모에게 진 빚을 다 갚았다고 할 자식이 어디 있겠으며, 스승에게 진 빚을 다 갚았다고 할 제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물론 하나님에게 진 사랑의 빚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해도 다 갚을 수 없습니다.(마 18:25 참조)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의 빚을 깨닫고 사느냐 못 깨닫고 사느냐 이 차이에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 앞에 진 사랑의 빚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마치 하나님께 빚을 진 바 없는 것처럼, 이 세상의 주인이 자신인양 너무나 의기양양하게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눅 12:16-19)

     

    하나님은 우리에게 재물을 맡겨주신 것이지 임의로 쓰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재물을 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이 재물로 가난한 사람을 돌보지 않고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합니다.

     

    사도 요한은 한 마디로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요일 3:17)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면 낮은 자리에서 섬기려고 하지 않고 높은 자리를 탐하고 군림하려고만 합니다. 세상의 높은 지위도 하나님의 인정하시는 자리여야 합니다. 그런데 난투극을 벌여가며 자리를 차지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결국은 강도짓을 하기 때문입니다.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눅 20:46-47)

     

    사도 바울은 사랑의 빚을 진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야 하며 이것이 사랑의 빚을 갚는 방법이라는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에게 진 빚을 갚는 길은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 '받은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과 세부적인 계명들을 주신 것도 이러한 사랑의 정신을 구체적인 법으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즉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살라고 주신 구체적인 계명들입니다. 결국 모든 계명의 근본 정신은 사랑에 있는 것입니다.(갈 5:14)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하신 말씀이 이런 뜻입니다.(9절)

     

    대부분의 신자들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16)라고 알고 있으면서도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을 하지 못하는 까닭은 하나님께 진 사랑의 빚이 다른 사람을 통해 갚아야 할 의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눅 10:37)

     

    본문에서 ‘빚지다’라는 말은 ‘의무가 있다’는 말과 어원을 같이 합니다. 사랑의 빚을 진 사람은 사랑의 의무가 있다는 말입니다. ‘피차’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처럼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서로 사랑하는 것은 의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조차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실제는 악을 저지르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부정을 저지르는 일(마 5:28), 자기 이권을 위해 편을 가르는 일(갈 5:20), 자녀를 노엽게 하는 일(엡 6:4) 등등입니다.

     

    십계명을 지킨다 하면서도 얼마든지 악을 저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10절)라는 말씀을 생각해 볼 때 계명을 지키는 자체 이전에 계명이 주어진 근원적 뜻을 아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일어날 결과 보다 먼저는 그 '동기의 순수성'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풀이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가르치신 말씀 속에서 우리는 이 뜻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눅 10:25-37)

     

    율법을 가르치는 어떤 사람이 영생을 얻으려면 무슨 일을 해야 하는 지를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새 계명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강도 만난 자를 돌봐준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이 이야기 가운데 등장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지 않은 것은 나름대로 계명을 지킨다고 한 것입니다.(레 21:1 참조)

     

    그러나 그들은 계명의 근본 정신을 몰랐습니다. 동기 보다 결과를 더 중요시했습니다. 실제 이웃 사랑의 계명을 지켜 행한 사람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었다는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는 계명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하지 말고 계명의 본래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강조한 모든 계명은 ‘이웃 사랑’이라는 정신 속에 요약된다는 말씀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과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요 15:12)

     

    예수님은 사랑의 기준을 자신이 보여준 사랑만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기준은 내 기준이 아니라 예수님 기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방식은 내 방식이 아니라 예수님 방식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의 방식은 끝까지 인내하며 용서하는 삶이었습니다.(마 18:22)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진실하게 행하는 삶이었습니다.(눅 10:37) 죽음 앞에서도 진리를 지키는 삶이었습니다.(요 18:37)

     

    우리가 진 빚 가운데 가장 큰 '사랑의 빚'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십자가 대속의 은혜입니다. 이 '사랑의 빚'을 깨달을 때 비로소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마 5:44)

     

    우리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이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날마다 묵상해야 하겠습니다.(엡 3:19) 날마다 '사랑의 빚진 자 의식'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마치 안경을 끼고 늘 세상을 보면서도 안경의 고마움을 모르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안경이 뿌예질 때만 잠깐씩 안경의 소중함을 살펴보는 것 같은 삶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의무를 저버리는 삶입니다. ‘아가페’라는 '하나님 사랑'은 기독교사전이나 신학사전의 정의를 보고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달 될 뿐입니다.

     

    하나님에게 진 사랑의 빚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해도 다 갚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에게 진 사랑의 빚을 최선을 다해 갚아야 합니다. 그 방법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마 5:46-48) 

     

    우리 안에 예수님이 보여주신 '이러한 아가페 사랑'(요일 3:3)이 있으면 우리 안에 있는 생명력이 흘러 전달되며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 사랑'을 더욱 깊이 묵상하고, 깨달은 바 실천하는 부활절 셋째 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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