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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님의 품으로
    교회력에 따른 본문 중심 설교 2008. 3. 9.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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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rodigal Son


    하나님의 품으로(눅 15:11-24)


    한번은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보는데, 영하 22도까지 내려가는 캐나다의 한 호수에서 얼음을 뚫고 고기를 잡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미끼를 내리자마자 금방 대어가 올라오는데, 나온 지 몇 초 만에 잡은 고기가 금방 꽁꽁 얼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자연의 현상이 저에게는 큰 의미를 던져주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물이 아무리 차더라도 얼음 아래 물에서는 물고기가 살 수 있지만, 호수 밖으로 나오면 죽고 얼어버리고만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인 “잃은 아들 비유”는 아버지 품을 떠나 방황하다가 거의 죽게 된 후 회개하고 아버지 품으로 다시 돌아온 둘째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독일의 헬무트 틸리케라는 유명한 목사님은 이 이야기의 궁극적인 주제가 탕자가 아니라 우리를 찾는 아버지라고 설교하면서, 하나님의 용서를 강조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본문에서 아버지 품을 떠난 둘째 아들에 주목해보고자 합니다.

     

    1. 둘째 아들의 세 가지 잘못

    문제의 시작은 둘째 아들이 자신에게 돌아올 유산분배를 요구하면서 부터입니다. 둘째 아들의 행위 속에는 크게 세 가지의 잘못이 나타납니다. 첫 번째로 이 아들은 아버지에 대해 무례한 행위를 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모가 죽기 전에 유산을 달라고 하는 것은 자녀의 도리가 아닙니다. “아버지, 재산 중에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우리 말 성경이나 영어 성경에는 12절에서의 “달라”(give me)는 의미가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주소서”의 헬라어, “didomi”는 단순하게 달라는 뜻이 아니라 명령하듯, 따지듯이 달라는 뜻입니다. 영어성경 중 The Message는 그 의미가 비교적 분명합니다. “Father, I want right now what's coming to me.” 지금 당장 내 놓으라는 말입니다.

     

    두 번째로 이 아들이 잘못한 것은 공동체를 떠난 것입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죽기 전까지 반드시 해야 할 일 두 가지가 바로 가정 공동체와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일입니다. 둘째 아들이 자신의 생활 공동체를 떠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자신의 직장 때문이라든지, 결혼 같은 특별한 일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13절을 보면 그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아버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몫을 챙겨서 먼 나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것을 다 써버렸습니다. 공동체를 떠나는 것이 죄입니다. 공동체를 떠나는 것은 물고기가 물을 떠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이 아들이 잘못한 것은 율법을 어기고 재산을 탕진한 것입니다. 유대의 율법에서, 아버지의 생전에 자녀가 유산분배를 받을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산의 처분권은 오직 아버지가 죽은 후에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은 필요할 경우 아버지를 부양할 수단이 되는 유산을 다 써버리고 만 것입니다.

     

    13절에 둘째 아들이 간 곳은 먼 나라라고 되어있는데, 여기서의 먼 나라는 당시에 큰 도시의 환락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술과 여자를 마음껏 즐기며 돈 자랑하다 결국 탕진하고 만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가 스스로 원해서 아버지의 속박을 벗어나 누린 자유는 실상은 자신을 제어하지 못한 무절제하고 방탕한 삶이었고, 결과는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선행은혜

    이제 우리는 본문을 읽다가 자칫 간과하기 쉬운 14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둘째 아들은 먼 나라에서 허랑방탕하며 가진 재물을 다 썼습니다. 가진 것을 다 썼으니 당연히 그는 궁핍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14절에 “다 없앤 후” 이후의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라는 문맥을 없애도 이야기 흐름에는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다 없앤 후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라고 해도 둘째 아들의 결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라는 말씀이 적혀있는 것은 분명 깊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는 가진 재물을 다 쓴 후 먹고살기 위해 무슨 일이든 구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육적 상태의 궁핍함에서 벗어날 길을 찾는 것은 인간의 원초적 본능입니다. 매슬로우의 인간의 욕구단계에서도 말하는 것처럼, 그 맨 처음이 Physiological Needs, 즉 생존을 위해 먹고 사는 생리적 욕구 단계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흉년이 들지 않았다면 그 아들은 아직도 정신차리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돈도 다 떨어지고 설상가상으로 그 나라 전체의 경제가 침체되어 일자리조차 구할 수도 없게 되자 비로소 자신의 영적 상태를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그 나라에 흉년을 주신 것이고, 이는 그가 하나님을 떠난 사실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었다는 말입니다. 흉년이라는 상황이 그 아들에게는 구원의 기회를 준 것입니다. 13절에 그가 살았던 허랑방탕한 삶은 원문에 의하면 “asostos” 즉 “구원에 합당하지 않게”로 번역할 수도 있으니, 구원에서 멀어진 삶을 살았던 그 아들을 하나님이 구원으로 초대하신 것이 바로 흉년이라는 도구인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세상에서 잘 나가던 사람이 한센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자신이 번 돈을 쓰러 돌아다닐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가 가야할 곳은 소록도였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 그가 고백하기를 소록도가 아니었으면 나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다고 간증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소록도를 통해 구원의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이제 그 아들은 돼지 치는 일을 하며, 돼지가 먹는 열매라도 먹고자 하였으나 주는 이가 없어 먹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비로소 그 아들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 지를 자각하게 됩니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돼지 우리에 살면서도 자신은 결코 돼지 우리에 살고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살아야 할 곳은 돼지 우리가 아니라 양의 우리입니다.

     

    요한복음 10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을 선한 목자로 비유하시고, 우리를 양으로 비유하십니다. 그리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양은 양의 우리에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품에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삶이 아무리 화려하고 멋져보여도 그곳은 돼지 우리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아들은 자각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돌아갈 것을 결심합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아버지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할까입니다. 아들은 이렇게 결심합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아들은 자각하고, 결단하고, 드디어 행동합니다. 20절 “이제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3. 아들의 회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행동입니다. 자각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결단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성경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선을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죄가 됩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께로 돌아갑니다. 돼지 우리에서 나와 양의 우리로 향해 갑니다. 돌아갈 차비가 없었기에 발이 불어 트도록 먼 길을 걸어갔을 것입니다. 허기진 채로 죽을 힘을 다해 돌아갔을 것입니다.

     

    이 아들은 자신이 생각했던 자유가 잘못된 것임을 알고,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하나 잘못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마음이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자신을 용서할 것인지, 자신을 받아들일 것인지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먼 곳에서부터 아버지는 아들을 보고 달려와 얼싸 안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당시에 오늘날과 같은 통신수단이 없었을 터인데, 아버지는 집 떠난 아들에게서 아무런 소식이 없으니, 얼마나 애간장이 탔겠습니까? 아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조차 모르니 아버지는 매일을 아들이 돌아오기 만을 기다리며 노심초사 집 앞에서 기다렸던 것입니다.

     

    기절초풍할 패션으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 아들을 아버지는 새 옷으로 갈아입히고, 반지를 끼웁니다. 반지는 네가 종이 아니라 내 아들이라는 표시입니다. 그리고 잔치를 벌이자고 명령합니다. 아버지가 기뻐하며, 잔치를 벌이는 이유는 24절에 나옵니다. 그 이유는 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잃었다가 다시 얻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품으로

    우리는 탕자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품을 떠나 내 마음대로 사는 인생이 얼마나 비참한 지를 볼 수 있습니다. 내 힘과 내 생각, 내 능력으로 잘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하나님을 떠난 삶은 고통이고, 허무한 결과만 남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허랑방탕한 삶은 곧 구원과 상관 없는 죽은 인생이었습니다. 물고기는 물을 떠나 살 수 없고, 양은 양의 우리를 벗어나서 살 수 없듯이 하나님 품 안에만 구원의 삶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내와 자비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너무나 크시기 때문에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를 맞아주십니다. 현재 내가 하나님을 떠난 삶이라면 지금이라도 패역한 세대를 피해서(행 2:40)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품 안에만 구원이 있고, 안식이고, 자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하나님이 주신 법은 우리를 속박하려는 법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자유를 주시는 법입니다. 예수 안에 자유가 있습니다. 예수 생명이 있는 공동체는 자유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품에서 살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품에서 살 때 참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출처: 동산교회 이관수 목사 (2008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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