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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늘이 열리는 축복
    교회력에 따른 본문 중심 설교 2012. 1. 15. 10:35


    주현절 후 둘째 주일[20120115]

    하늘 문이 열리는 축복(요 1:43-51)


    주현절 후 둘째 주일 아침입니다. 기쁨의 동산에 모인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영생의 말씀(요 6:68)이 목마르고 지치고 연약한 우리 심령에 하늘의 위로와 평강과 소망이 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이 시간 “하늘 문이 열리는 축복”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증거할 때에 살아계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은혜(마 16:16, 마 27:54, 요 1:49, 요 11:27, 요 20:28)를 경험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빌립을 제자로 부르시고, 빌립의 소개로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나는 사건입니다. 요한복음은 저자 요한이 한 단어 또는 한 문장마다 새겨놓은 심오한 뜻을 깨달을 때면 우리 안에서 감탄사가 저절로 나오는 영적인 복음서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예수님과 나다나엘의 만남이 중심을 이루면서 둘과의 대화 가운데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영적인 메시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4세기 '닛사의 그레고리'라는 교부는 「모세의 생애」에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가파른 산을 오르는 것과 같아서 많은 사람들이 그 산 밑에도 이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사실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온전히 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소문으로만 듣거나 아니면 인사만 나눈 정도라고 한다면, 그럴 때 내가 그 사람을 잘 안다고 누구에게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안다 할 수 있는 것은 만나서 마음의 대화를 나누고 그의 삶을 눈으로 볼 때 본래 모습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내가 누구를 진정으로 안다고 할 때 그것은 둘 사이의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지고서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요한복음과 다른 복음서들과의 차이점를 잠시 생각하고 넘어갔으면 좋겠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그리고 요한이 전하는 복음서들 모두 예수의 가르침과 제자가 되는 길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초대하시는 제자의 길이 곧 하나님을 만나는 신비의 세계가 된다는 사실을 표현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만남이라는 사건 자체를 극적으로 부각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들에서는 예수님이 부르시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서야 예수를 메시야로 인식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를 만나는 사람들 모두 처음 예수를 보지만 곧 그가 메시야라고 인식하게 됩니다.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믿음의 세계 곧 예수를 믿고 그의 제자가 된다는 의미는 예수를 보는 것이요 예수를 만나는 사건과 동일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선포합니다.(요 1:29) 또한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 베풀 때에 자신의 입으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사람들에게 증언합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의 제자가 된 안드레는(요 1:40) 형제 시몬에게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고백합니다.(요 1:41)

    이렇게 요한복음은 참 빛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소개하는 것으로 1장을 시작하면서, 그 예수님과 세례 요한, 안드레, 시몬 베드로, 그리고 빌립과 나다나엘까지의 일련의 만남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하는 신앙 고백이 공통적으로 다 예수가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 자신이 만난 예수를 소개할 때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만났다”(요 1:45)라고 말합니다.

    나다나엘은 빌립과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그의 말로 전해 듣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나다나엘이 빌립의 말을 불신한다고 해서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쉽게 단정 짓지는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이후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잘 알 수 있지만 나다나엘은 “그 속에 간사함이 없는”(요 1:47) 사람이었고, 그는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던”(요 1:48) 사람이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먼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다”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싯다르타가 보리수 아래에서 명상하다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장면을 연상하시면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되리라 생각합니다.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다는 표현은 일종의 관용구로써 그가 모세의 율법과 선지서를 마음에 새기며, 이스라엘의 메시야를 기다리는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나다나엘은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세오경과 선지서를 통해 하나님이 약속하신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신명기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라”는 모세의 예언이 있습니다.(신 18:15) 미가는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미 5:2)라고 예언하였습니다.

    나다나엘은 이스라엘에 메시야가 오시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결코 믿음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는 약속을 기다렸고, 다윗의 시편대로 “예루살렘에 평화가 깃들도록”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시 122:6)
     
    그런 나다나엘에게 빌립이 전한 소식이 바로 "우리가 기다렸던 메시야가 나사렛으로부터 오셨고 내가 직접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다나엘은 메시야가 어찌 유대 땅이 아닌 이방의 갈릴리에서 나올 수 있는지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 갈릴리는 사마리아 북쪽의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한 땅입니다. 이 땅은 이방인과의 혼혈로 신앙이나 문화에 있어 순수성을 잃은 전통적인 유대와는 많은 차이가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더구나 나다나엘은 선지서를 통해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나신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갈릴리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느냐”는 의구심은 아주 당연한 것입니다.

    이때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하는 말이 그렇다면 “와서 보라” 하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빌립은 자신의 말로 판단하지 말고 와서 직접 만나보면 메시야인지 아닌지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46절과 47절의 행간을 읽기는 쉽지 않습니다. 빌립과 나다나엘이 친분이 있는 사이라고는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건데 나다나엘이 빌립이 소개하는 예수를 일단 만나기나 해보자는 편안한 마음으로 나선 것인지 아니면 빌립이 강권하여 어쩔 수 없이 따라간 것인지를 알기는 어렵습니다.

    어떤 상황이었건 빌립이 나다나엘과 동행했을 가능성은 많습니다. 분명한건 예수님의 제자가 된 빌립은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나도록 인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빌립 역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표상이어야 합니다. 예수를 만날 수 있도록 돕는 역할, 한 사람을 죄의 길에서 돌이키고, 구원으로 인도하는 일은 분명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입니다.

    5만번 이상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는 조지 뮬러도 한 친구의 회심을 위해 기도했지만 오랜 동안 응답이 없다가 그 기도가 63년 8개월만에 이루어졌다는 일화는 유명하지요. 예수를 만난 사람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이어야 하는 것입니다.(약 5:20)

    오늘 본문의 나다나엘과 예수와의 만남은 요한복음 1장에 등장하는 예수와 다섯 사람과의 만남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만난 뒤 예수가 누구신지를 고백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고 의심했던 나다나엘도(요 1:46)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나서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왕입니다.”라는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요 1:49)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빌립과 예수와의 대화는 특별하게 언급하지 않는 저자 요한이 나다나엘과 예수의 만남의 사건에서는 마치 참았던 말보따리를 풀어놓듯이 예수님의 입을 열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본문의 말씀은 문자적으로 예수가 나다나엘에게 하는 말씀 같지만 1장 전체적으로 보면 그동안 침묵하셨던 예수님이 마침내 나다나엘이라는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음을 선포하시는 영적인 장면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이제 나다나엘과 예수의 만남이라는 사건이 과연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나다나엘과 예수와의 만남 속에 있는 복음의 신비를 찾는 열쇠는 예수님의 두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보고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는 말씀이고(요 1:47), 또 하나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는 말씀입니다.(요 1:51)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신 선포는 그가 혈통적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사실을 새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의 말씀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라”는 말씀처럼(롬 2:28),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평강과 예루살렘의 회복을 소망하는 정직한 자가 진짜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선포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 옛날 야곱은 태생 술수부리는 자로 태어나서 속이는 일, 간사한 일을 하며 살았습니다.(창 27:35) 예수님의 선포는 참 이스라엘로 불리는 나다나엘과 첫 이스라엘이었던 야곱과의 대조를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시대에도 나다나엘처럼 정직하고 의로운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런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이 하시는 약속은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그에게 하늘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궁극 인간이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없고, 인간의 힘으로 하늘의 문을 열 수 없는 법, 그런데 예수를 만나면 하늘이 열리는 축복이 있다니 이 얼마나 흥분된 일입니까?

    하늘 문이 열려있는 곳 그곳이 이 땅의 벧엘입니다.(창 28:19) 과연 우리의 삶에는 하늘 문이 열려습니까? 내 가정은 하늘 문이 열린 가정입니까? 우리 교회는 하늘 문이 열린 교회입니까? 하늘 문이 열려있는 그 곳이 하나님의 장막,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입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나는 사건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늘 문이 열린다는 진리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만이 하늘 문을 여실 수 있습니다.(계 3:7) 하늘 문이 열리지 않으면 그 누구도 하나님을 만날 수도 볼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이 얼마나 큰 기쁨입니까? 예수님을 통해 잃어버렸던 에덴에서의 하나님과의 동거가 회복되고, 예수님을 통해 야곱에게 약속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약속이 성취됩니다. 저는 여러분이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하늘 문이 열리는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하늘 문이 열리는 복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 이 선물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나다나엘이라는 이름의 뜻이 바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의미입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경험하고 비로소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자신의 이름값을 하게 됩니다. 아무리 이름을 거창하게 지어도 그 이름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난 나다나엘. 그때 나다나엘은 이름대로 하늘 문이 열리는 하나님의 선물을 약속받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하는 이 시대의 나다나엘이 되길 소원합니다. 우리가 나다나엘처럼 정직하게 행하고(시 15:2), 한결같이 예수님만 바라본다면(히 12:2), 영적 계시의 세계가 열리고(엡 1:17), 이 땅에 살지만 하늘과 연결된 사람이 됩니다.(창 5:24) 우리 인생이 나다나엘에게 약속하신 것처럼 하늘 문이 열리는 축복이 있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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