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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한 삶의 비결
    교회력에 따른 본문 중심 설교 2012. 7. 3. 12:05

    성령강림절 후 다섯째 주일[20120701]

     

    행복한 삶의 비결(눅 15:25~32)

     

     

    하나님이 우리들 각자에게 주신 인생은 소중합니다. 어떠한 사람도 쓸모없이 태어난 인생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마련해 놓으신 인생을 풍요롭고 아름답게 살아야 할 자유와 책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복을 올바로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의 행복한 삶을 파괴하는 요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4세기의 영성가 에바그리우스는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아홉 가지 죄성을 통찰했습니다. 이것을 세 영역으로 나누면 탐욕적인 영역, 감정적인 영역, 정신적인 영역으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탐욕적인 영역으로는 탐식, 성욕, 소유욕 등이 연관됩니다. 탐욕스러운 사람은 음식도 성도 소유도 즐기지 못합니다. 계속 채워야 하고, 육적인 만족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더 가지려는 일에 몰두함으로 소유의 진정한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감정적인 영역에는 슬픔, 화, 나태의 세 가지 악습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 안에는 공격성이 있는데 이것이 긍정적인 힘으로 표출되지 못하고, 자신 안으로 향하게 되면 그것은 절망, 증오, 괴로움 등으로 나타납니다. 창조적으로 일할 수 있는 에너지를 적절한 방법으로 사용하지 못하면 자신의 고유한 삶을 살아내지 못하게 됩니다.

     

    세 번째로 인간을 위험에 처하게 만드는 영역이 정신적인 영역인데, 여기에 세 가지 악습이 명예욕, 질투심, 교만입니다. 이러한 죄는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결국 스스로를 파괴하고 맙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두 아들은 모두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살지 못하는 경우를 보여줍니다. 작은 아들은 배은망덕한 아들이었습니다. 게다가 다른 나라에 가서는 성실하게 살지 못하고 가진 재산을 모조리 탕진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작은 아들에게서는 탐욕적인 영역과 감정적인 영역에서 낮은 레벨의 인생으로 전락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돼지 치는 신세’가 되었다는 15절의 표현에서 예수님은 작은 아들이 인간적 가치를 완전히 잃어버린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영적으로는 ‘허랑방탕하게’(13절)라는 ‘아소토스’라는 단어에서 작은 아들의 삶이 구원을 떠난 상태라는 사실을 암시받게 됩니다. 달리 표현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상태 그것이 구원을 상실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동생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하는 큰 아들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큰 아들의 경우도 작은 아들에 비해 더 나을 바는 없습니다. 에바그리우스가 말하는 감정적인 영역과 정신적인 영역의 죄성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미워하고, 질투하고, 아버지에게 화를 내기까지 합니다.

     

    사실 큰 아들의 모습은 모든 사람 안에 감추어진 죄성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통해 전하고자 하시는 메시지도 여기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한 분 하늘 아버지 아래 같은 형제자매들입니다. 그럼에도 너와 내가 핏줄이 다른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를 듣는 처음 청중들은 누구입니까? 누가복음 15장 1~2절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세리들과 죄인들이 나아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 그 자리에 같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으려는 간절함은 없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율법주의자들이고 선민의식이 가득한 사람들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가까이 대하시는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세리와 죄인을 멸하시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지금 말씀을 통해 큰 아들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작은 아들은 비록 아버지 집을 떠난 죄인 신세가 되었지만 이제는 다시 아버지 품으로 돌아온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리들과 죄인들을 이 둘째 아들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과거에는 구원을 떠난 비참한 신세였지만 아버지 품으로 돌아온 순간 신분이 다시 회복됩니다.

     

    ‘돌아온 탕자 이야기’로 알려진 이 비유는 짧지만 그 의미를 곱씹을 때 마다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하며, 구원의 깊은 의미를 발견하게 해 주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전해주시고자 하는 세 가지 영적인 메시지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먼저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올바른 하나님 상을 전해주고자 하십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엄위로우신 하나님, 토라의 하나님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죄인을 용서해서는 안 되는 하나님이어야 했습니다. 죄를 지었으면 응당한 대가가 있어야 하는데, 좋은 옷에다 송아지 그리고 반지가 웬 말입니까?

     

    그런데 우리도 큰 아들의 생각과 같을 때가 많습니다. 이 세상에 공평하지 못하고 불의한 일들이 많다고 느껴집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추수 때까지 곡식과 가라지를 그냥 놔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3:30) 아흔아홉 마리의 양도 소중하지만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내는 것 곧 한 사람의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기쁨이 넘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가르쳐주십니다.(눅 15:7)

     

    두 번째로 예수님은 한 인간이 어떻게 하면 온전한 구원을 누릴 수 있는 지를 보여주고자 하십니다. 구원은 현재 내가 하나님과 함께 있는 상태입니다. 과거의 내가 하나님을 떠난 죄인이었을 지라도 회개하고 ‘일어나서’(아나스타스) 아버지 품으로 돌아오면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행복이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하나님 나라(잔치)에 참여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장소와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변화됨에서 행복이 깃듭니다. 똑같은 일상일지라도 아침에 눈을 뜰 때 오늘도 ‘일어나서’ 아버지와 함께 하는 일이 부활을 경험하는 첫 걸음입니다. 그것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듯 이 비유를 통해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시고(딤전 2:4), 인간의 존재 가치를 회복하는 구원(행복)의 상태를 가르쳐주실 뿐 아니라 세 번째로 이 비유를 선포하시는 예수 자신이 누구인지를 증거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온전히 알려주시려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탄이 하는 일이란 우리의 생각에 왜곡된 하나님 상을 불어 넣어 자신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라는 고정관념을 갖게 해 그런 자기의 생각대로 살게 만듭니다. 결국 그 길은 죄를 짓게 만들고 마지막은 파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탄의 일을 멸하려 오셨습니다.(요일 3:8)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온전히 알 때 비로소 나 자신도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게 되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만드신 분이지 율법에 갇혀있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하나님이지 특정한 사람들만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비유에서 큰 아들은 특권 의식에 사로잡힌 아들로 묘사됩니다. 따라서 늘 특별한 대우를 기대했습니다.(29절) 나중에는 질투가 변하여 분노하기까지 합니다.(28절) 마치 요나가 니느웨 백성을 심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에게 화를 내는 것과 같은 꼴입니다.(욘 4:1)

     

    이 이야기는 완전한 결말로 끝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아버지는 분노하는 큰 아들에게 인자하게 권면하면서 잔치 자리에 들어가기를 초대합니다.(28절) 32절로 끝나는 본문에서 큰 아들이 잔치 자리에 들어갔는지 끝내 안들어 갔는지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큰 아들이 분노하고 동생에 대해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분명하게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큰 아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면서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자들과도 같습니다. 우리만 구원받는다는 특권의식, 교파의식, 우월주의에 사로잡힌 자들입니다. 반면 아버지 품으로 돌아오기 전 작은 아들은 오늘날 하나님 없이 자기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들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인간의 가치를 상실한 불행한 인생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인류의 하나님은 한 분이심을 알려주십니다.(엡 4:6) 그렇다면 비유에서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은 누구를 상징하고 있습니까? 한 분 하나님을 부모로 모시고 있는 똑같은 자녀들일뿐입니다. 두 아들은 우리 모두이며 서로 사랑해야 할 가족입니다.

     

    이러한 영적 진리를 가르쳐 주시는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중보자 되십니다.(딤전 2:5) 예수님은 너와 나를 가로막고 있는 담을 육체로 허문 분이십니다.(엡 2:14) 할례자와 무할례자의 차별을 없애신 분이십니다.(골 3:11)

     

    예수님은 아버지와 작은 아들, 큰 아들이 등장하는 이 비유를 통해 이러한 영적 진리를 우리에게 선포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 모두는 작은 아들 아니면 큰 아들의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마음이든 이 둘은 온전한 구원을 방해하도록 사탄이 우리 마음에 놓는 덫입니다.

     

    하나님은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죄인의 옷이 아닌 자녀의 옷을 입고 새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사랑 많으신 분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자녀가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이 진리를 오늘날 우리에게도 던지시며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를 촉구하고 계십니다.(살전 2:13)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 행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길 간절히 원하시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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