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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난 속의 신앙고백
    교회력에 따른 본문 중심 설교 2010. 11. 8. 20:04

    성령강림절 제24주일[20101107]

     

    고난 속의 신앙고백(욥 19:23-29)

     

    신성종 목사가 쓴 「내가 본 지옥과 천국」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보면 천국에는 찬양 소리가 있습니다. 찬양이 울려퍼지고 있을 뿐만아니라 세상에서 우리가 부른 찬양들이 버려지지 않고 ‘찬양의 산’에 쌓여 금빛처럼 빛나고 있었습니다. 또한 천국에는 우리가 기도한 모든 것이 산처럼 쌓여 있습니다. ‘기도의 산’에 기도한 사람의 이름과 기도의 내용이 녹음 테이프처럼 수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세상에서 하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비록 실언했을지라도 회개한 것은 다 지워지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다 그대로 쌓여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욥은 “나의 말이 책에 기록되고, 지워지지 않게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다”고 고백합니다. 욥은 친구 세 명과 대화하며 자신의 억울함을 누구에게 호소할 데가 없습니다. 욥이 당한 고통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욥은 자신의 자식들이 행여나 죄를 짓지 않았을까 번제까지 드렸을 정도로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루 아침에 자녀와 재산을 다 잃고 온 몸에 피부병까지 앓으며 알거지가 되었을 때 욥은 누구를 원망할 수 있었겠습니까?

     

    욥의 부인이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라고 까지 말했을 때도, 욥은 입술로도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비참한 고통가운데 있는 욥에게 세 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 찾아와 진정한 위로는 못할망정 그것은 죄로 말미암았다고 비난의 말을 했습니다.

     

    친구들의 말들을 보면 상식적으로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 좋고 진리일 수는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3절에서 바울은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하나님 중심적인 사고를 가진 것은 좋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인과응보 사상은 기계적인 하나님을 말할 뿐 삶의 신비를 다 헤아리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친구들은 하나님의 경륜을 말하고는 있지만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인간이 정한 테두리를 넘어선다는 진실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친구들이 말하는 것은 전통과 이데올로기같은 믿음일 뿐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이의를 달지 않습니다. 그러나 억울한 것은 사실입니다. 욥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라는 관점에서 자신의 문제를 곰곰이 되새겨 볼 때 하나님은 정의롭지 않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욥은 감히 자기의 의로움을 변증하기 위해 재판정에 서게 되기를 요청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자기 사이를 판단해 줄 심판자를 바라고 있습니다.

     

    욥은 이방인입니다. 욥의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전통적 사상이나 한 인간의 개인적 체험을 너머 선 우주적 차원입니다. 욥이 겪는 삶의 애환은 민족, 종교, 사회, 역사 등을 초월한 모든 사람이 겪는 실존의 아픔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실존의 고통입니다. 내가 만약 욥이라면 과연 욥과 같은 신앙 고백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1. 욥은 구원의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었습니다.

    25절입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진정한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욥이 당한 고통을 보며 욥을 평가하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자신의 무고함을 들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조차 침묵하십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습니다.

     

    “나의 대속자가 살아계시다.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다.” 여기서 땅은 ‘에레츠’가 아니라 ‘아파르’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이는 티끌, 먼지, 재라는 의미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 땅이 아닌 먼지 나는 고난의 현장에, 그곳이 비록 무덤같고 암흑같은 곳일지라도 하나님이 반드시 찾아와 나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욥은 믿습니다. 나의 대속자가 살아계심을 믿고 나의 기록된 말을 반드시 들어줄 분이 계시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2. 욥은 구원의 하나님이 영원하심을 믿었습니다.

    욥은 자신의 말이 기록되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비록 지금은 아무도 나를 변호하는 이 없지만 나의 무고함이 반드시 언젠가 들어날 것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내가 죽고 난 후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26절에, 욥은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라고 고백합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신앙고백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가운데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반드시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대속자가 되십니다.

     

    욥처럼 절망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입술로 범죄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욥은 이방인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욥이 믿은 하나님은 인과응보의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이 주신 즉 거두실 수도 있는 분, 욥기 1장 21, 22절에서처럼,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은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갈 것입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것입니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친구들이 욥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더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을 때 욥은 죽음 이후에도 변함없는 영원한 친구같은 하나님을 믿고 고백합니다.

     

    3. 욥은 고난 중에도 더욱 하나님을 열망합니다.

    욥의 믿음은 비록 비참한 실존이지만 고엘의 하나님을 반드시 만날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27절을 공동번역으로 보면, “나는 하느님을 뵙고야 말리라. 나는 기어이 이 두 눈으로 뵙고야 말리라. 내 쪽으로 돌아 서신 그를 뵙고야 말리라. 그러나 젖먹던 힘마저 다 빠지고 말았구나.”

     

    여러분 고난 중에 있을지라도 더욱 하나님을 찾기 바랍니다. 고통 가운데 있을 지라도 하나님을 더욱 열망하시기 바랍니다. 욥은 천국에서 반갑게 맞아 주실 따뜻하고 정다운 하나님을 뵐 것을 생각하며 위로를 삼고 있습니다. 바울도 천국에서 주님을 뵐 것을 생각하며 소망이 가득 찬 전도자의 삶을 살았음을 봅니다. 빌립보서 1장 23절에, “나는 그 둘 사이에 끼여 있으나 마음 같아서는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싶습니다. 또 그 편이 훨씬 낫겠습니다.”

     

    로마서 4장 18절에, “아브라함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믿어서 마침내 "네 자손은 저렇게 번성하리라." 하신 말씀대로 "만민의 조상"이 되었습니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희망이 안보이고, 절망 가운데서 생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욥의 고난을 생각해 보십시오. 수백억의 재산을 잃고 열 명의 자녀들이 하루 아침에 죽었는데 욥이라고 자살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생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소중한 진리를 붙들었습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영원한 구원자, 친구, 변호인이 되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인생에 고난도, 기쁨도 다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살 수 있다는 것이 행복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연습을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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