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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회퍼와 그의 기도의 삶
    성경적 구원의 길 2008. 1. 5. 13:01



    본회퍼와 그의 기도의 삶


    이관수



    들어가는 말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의 삶과 그의 신학이 현대의 그리스도인과 교회에 던지는 중요한 질문 중 하나는 그가 가담한 히틀러 암살 음모의 정당성 문제이다. 그가 옥중에 있었던 어느 날, 어떤 이태리인이 “당신은 크리스천이고 목사이면서 어떻게 이런 음모에 가담할 수 있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본회퍼는 조금도 주저 없이 “만일 어떤 미친 사람이 자동차를 몰고 사람이 걸어 다니는 보도 위로 달리기 시작했다면, 나는 목사로서 그 자동차에 희생된 사람의 장례를 치르고 그 친족들을 위로하는 것으로 내 임무를 다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그 장소에 있었다면, 나는 그 자동차를 빼앗아 타고 그 미친 사람에게서 핸들을 빼앗아야 할 것입니다.”하고 대답했던 것이다. 나는 이 말이 본회퍼의 기도의 삶에서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본회퍼의 신학은 그의 삶의 자리와 그의 삶 속에서 나왔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삶을 깊이 이해해야만 그의 신학을 이해할 수 있다. 본회퍼는 시와 음악, 시편을 사랑한 사람이었으며 또한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기도는 그의 삶이었다.

     

    기독교 윤리학은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선하고 바른 삶을 규명하려는 학문적 작업이다. 이런 면에서 본회퍼의 기도의 삶은 윤리적 접근이 가능하다. 기도의 윤리학은 실천과 명상, 기도가 통전성을 이루어야 한다는 전제를 가진다. 기도의 윤리학은 무엇이 참되고 바른 기도인가에 관심한다. 우리의 행위들이 진정한 책임의식을 수반한 결단의 결과일 때에만 올바른 행위일 수 있듯이, 기도도 올바른 인식과 참된 결단이 수반되는 것이어야 한다. 그를 행동하는 신앙인이라 부를 때, 그 원동력은 그의 기도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논고는 본회퍼가 기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그의 삶으로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에 주는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Ⅰ. 본회퍼의 삶에서 기도의 의미

     

      “그리스도인의 말과 일과 노동은 모두 그대로 기도가 됩니다.” 본회퍼의 신학에서 기도의 의미는 기도가 곧 그의 삶이요, 삶이 기도 그 자체가 된다는 데에 있다. 먼저 본회퍼는 기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여기서[시편] 우리가 배우는 것은 첫째 기도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기도한다는 것이요, 약속을 믿고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계시된 말씀이라는 튼튼한 터 위에 서 있는 것이요.......참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발판으로 하고 기도합니다.

     

    본회퍼가 말하는 기도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단어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이다. 첫 번째로, 본회퍼에게서 기도는 “말씀과 함께”하는 것이다. 그에게 성서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다. 본회퍼가 강조하는 것은 전체로써의 성서이다. “성서는 표어가 아닙니다. 하루의 양식일 수도 없습니다. 성서는 전 인류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어느 시대에나 타당한 것입니다. 성서는 마디마디 떨어지는 구절들로 되어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전체로써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는 시편을 사랑하고 시편과 함께 기도하라고 가르친다. 그 이유는 시편이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서라는 데에 있다.

     

    “우리의 모든 기도 가운데서 살아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뿐입니다. 이것만이 그 기도가 성취되리라는 약속을 받는 것이요, 이방인들처럼 공연히 말만 늘어놓는 것을 면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편에 깊숙이 들어가면 갈수록, 시편을 우리의 기도로 삼으면 삼을수록 우리의 기도는 그만큼 소박하고 풍부하게 됩니다.”

     

    두 번째로, 본회퍼의 기도의 신학에 흐르는 중심 주제는 “그리스도”이다. 본회퍼는 십자가를 통해 신을 인식할 수 있다는 루터의 신학을 받아들인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 기도의 대상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믿는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할 수 있다.

     

    “기도는 모두 중재적이요, 직접적 기도는 있을 수 없다.......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기도에서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기도의 정체는 곧 신앙이요, 그리스도에 묶임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 기도의 유일한 중보자이기도 한 것이다. 그의 가르치심에 따라 우리는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기도는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그의 말씀에 매인 기도이다.”

     

    본회퍼가 말하는 십자가는 그리스도를 따름이다. 본회퍼는 주기도문을 해설하면서, “예수는 어떻게 기도하라는 것뿐 아니라, 무엇을 구하라고도 가르치셨다. 주기도문은 제자들의 기도를 시범할 뿐 아니라, 예수가 가르치신 것같이 기도해야 한다.”라고 가르친다.

     

     

    Ⅱ. 본회퍼의 기도의 방법

     

      본회퍼는 그리스도인은 세 가지 목적 때문에 날마다 홀로 있을 시간을 정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곧 성서를 명상(Scripture meditation)하고 기도(prayer)하고 대도(intercession)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다 매일 명상의 시간에 빠질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본회퍼의 기도의 방법은 명상 곧 말씀 묵상(meditation)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특징은 “말씀과 함께”한다는 것이다.

     

    한번은 본회퍼가 왜 말씀 묵상을 하십니까? 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대답하기를, “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분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성서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마리아처럼 그것을 마음속에서 생각하십시오.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것이 말씀 묵상입니다.”라고 말했다. 본회퍼가 핑켄발데(Finkenwalde)에 신학교를 세웠을 때, 매일 하루에 한번씩 조용한 말씀 묵상은 30분 동안 실천되었다. 그리고 본회퍼는 죽기 전까지 매일성구(Daily Texts)를 통해 말씀 묵상을 하였다.

     

    본회퍼의 “매일의 말씀 묵상에 관한 가르침”(Instructions in Daily Meditation)은 핑켄발데에서 목사후보생들을 가르치면서부터 시작한 것이다. 신학생들에게 매일 아침마다 30분 동안의 침묵의 말씀 묵상 훈련은 상당히 힘든 일이었다. 그들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몰랐고, 어떤 학생은 잠을 자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회퍼는 말씀 묵상의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 가르쳤다.

     

    먼저, “왜 말씀 묵상을 해야 하는가?”를 설명하면서, “그리스도인이기에,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 가는데 깊이 침투하지 않으면, 나는 그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확고한 근거 위에서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기에, 다른 방법이 아닌 오직 선포된 말씀을 들으므로 그리고 기도하는 말씀 묵상으로만 성경을 알 수 있다.”고 가르친다.

     

    두 번째로, “말씀 묵상으로 내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설명하면서, “우리는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길 바란다. 우리는 그 분이 우리에게 주시기 원하는 것과 오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가르치시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듣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펼쳐야 한다.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에 앞서 먼저 그 분을 만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라.......말씀을 통해서 오늘 하루의 그 분과의 교제, 그 분의 도움, 그 분의 인도하심, 이것이 말씀 묵상의 목표이다.”

     

    세 번째로, “말씀 묵상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 “누군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말을 당신은 분해하고 분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듯이, 성경의 말씀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새로운 생각을 찾거나 설교와 본문을 서로 연결하려고 하지 마라.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묻지 마라. 그것이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물어라! 그리고 그 말씀이 당신을 완전히 사로잡을 때까지 충분히 마음 속 깊이 숙고하라.......말씀 묵상은 성령을 간구하는 기도와 함께 시작하라. 그리고 말씀을 넘겨 펼쳐라.”

     

    마지막으로, “말씀 묵상의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반복해서 매일 자리에 앉아서, 인내하며 기다려야 한다.......똑같은 본문을 반복해서 읽고, 당신의 생각을 쓰고, 암송하라.”

     

     

    Ⅲ. 본회퍼의 기도의 실천

     

    1. 『나를 따르라』

      본회퍼에게 있어서 기도의 근거는 신앙이다. 이는 곧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본회퍼는 주기도문의 ‘나라가 임하옵시며’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따르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을 경험하였다. 사탄이 이미 정복된 것이다. 세상과 죄와 사망의 권세가 이미 꺾였으나 아직 하나님 나라가 고난과 싸움 속에 묻혀 있음은 불러냄을 받은 작은 무리의 교회가 이 나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교회는 물론 새 의에 의한 하나님의 지배 하에 있으나 아직 핍박 중에 있음은 그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가 지상의 공동체로서 자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를 해석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그를 따르는 자들은 자신의 뜻을 완전히 하나님의 뜻에 위탁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온 땅에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이다. 즉 그 뜻에 거역하는 자가 없어야 한다.”라고 본회퍼는 말한다. 본회퍼는 기도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으로 보았다.

     

    『나를 따르라』(1937년)와 『신도의 공동생활(1938년)』이 나온 삶의 자리는 ‘형제의 집’이라고 불렀던 핑켄발데의 고백교회 신학생 훈련소이다. 여기서 본회퍼는 신학생들을 가르쳤을 뿐 아니라 신학생들과 함께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송했으며 서로 죄를 고백하고 용서하였다. 1935년 영국에서의 안정된 목회 자리를 포기하고 본회퍼가 독일로 돌아온 것은 독일교회를 비판하고, 히틀러에 항거하기 위해 온 것이다. 『나를 따르라』는 이러한 삶의 자리에서 나온 글이다. 여기서 본회퍼는 종말론적이면서도 성화의 추구를 강조하고 있다. 곧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을 가르치고 있다. 이는 기도와 엄격한 훈련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기도에 의한 그날, 그날의 훈련과 하나님 말씀의 끊임없는 연구, 또 절제와 규율에 의한 여러 가지 육체적 훈련이 이것을 도울 것이다.”라고 본회퍼는 말한다.

     

    2. 『기독교 윤리』

      1940년에서 1943에 걸쳐 전쟁과 저항운동 속에서도 본회퍼는 저술을 계속했는데, 이것을 베트게(Eberhard Bethge)가 편집한 것이 본회퍼의 미완성 작품인 『기독교윤리』이다. 『나를 따르라』를 완성할 때쯤에 이미 본회퍼는 기독교 윤리학의 문제를 새롭게 연구할 것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는 이 일을 그의 필생의 작업으로 생각했었다. 여기서도 그는 산상설교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말해진 것으로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복종하는 것으로 행위를 강조한다. 그리고 그 행위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행위임을 말한다.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유일하고 적절한 태도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임이 명백하다. 산상설교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말해진 것이다(마7:24 이하). 오직 행위로써만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생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서 인간의 자기의 권리와 자기 의인을 버리고, 행위에서 그는 겸손히 자비로운 심판주에게 자기를 맡긴다. 성서가 행위에 대하여 그렇게 중요시한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선악에 대한 자기의 지식에 근거를 둔 모든 자기 의인을 인간으로부터 제거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성서가 행위를 요구할 때는 인간에게 자기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지시한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 15:5). 이 말씀은 전적으로 엄밀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행위란 존재하지 않는다.”

     

    3. 『옥중서간』

      본회퍼가 1943년 4월 체포된 때로부터 1945년 4월 9일까지 약 2년 동안 각처의 강제수용소를 전전하면서 옥중 생활 속에서 서신왕래를 한 것을 편집한 것이 『옥중서간』이다. 따라서 『옥중서간』의 삶의 자리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수용소의 방이다. 여기서도 본회퍼의 기도의 삶은 편지 곳곳에 나타난다. “오늘 새벽 ‘형제단의 매일의 성구’에서 특별한 감명을 받았습니다. ‘내가 그 땅에 평화를 줄 것인즉 너희가 누우나 너희를 두렵게 할 자가 없을 것이며.......’(레 26:6)” 두려움과 위협의 상황에서도 말씀의 묵상은 말씀으로 존재하시는 그리스도가 본회퍼의 존재를 해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나는 다시 한번 ‘나날의 성구’를 들고 거기에 생각을 모았다네.......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성취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은 거듭해서 매우 오랫동안 아주 냉정하게 예수의 생애와 말과 행위와 고난과 죽음을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네.......확실히 우리들의 기쁨은 고난 속에, 우리들의 생은 죽음 속에 숨어 있네.......그러나 이러한 불안한 시대에는 우리들은 언제나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살 가치가 있는가 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만다네. 우리들은 이 사람 혹은 저 사람이 살고 있으니까 자기도 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네. 그러나 사실은 이렇다네. 이 세계가 인간 예수 그리스도를 지탱할 자격이 부여되었을 때, 예수와 같은 인간이 산 일이 있을 때, 그리고 그때에만 우리들 인간에게는 살 의미가 있다는 것이네. 만일 예수가 산 일이 없다면, 우리가 알고,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달리 암만 많다고 해도 우리들의 생은 무의미할 것이네.”

     

     

    나가는 말

     

      지금까지 본회퍼의 기도의 삶을 그의 저서를 통해 살펴보았다. 그는 말씀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였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와 따름이라고 하였고 동시에 사랑과 부활은 바로 그 곳에 있는 것이다.” “시간은 짧고 영원은 길다. 지금이 결단의 때이다. 지금 말씀과 신앙고백에 머무르면 심판 때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도울 것이다.......생명을 바쳐 예수를 지킨 자들에게 예수는 자신을 영원히 줄 것이다.” 본회퍼는 이 약속을 굳게 믿었기에 순교의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 논고를 정리하면서 나는 비록 삶의 자리는 다르지만 본회퍼가 이해하는 기도와 웨슬리가 이해하는 기도의 유사점을 두 가지 정도 언급하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본회퍼의 기도의 삶이 오늘 한국교회 공동체에게 주는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먼저 웨슬리와 본회퍼의 기도 이해의 유사점을 살펴보면, 첫 번째로 두 사람 모두 기도와 행위(works)와의 불가분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과정신학자인 마조리 수하키(Marjorie Suchocki)는 웨슬리의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관한 평이한 해설』(A Plain Account of Christian Perfection)을 해석하면서, “웨슬리는 기도와 행위를 깊이 연관시킨다.”고 말한다. 그리고 기도와 행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도의 삶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증가시키며,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 세상이 행복해 지기를 열망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기도뿐만이 아니라 이웃과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을 향한 사랑의 행위로도 그 표현을 찾아야 한다. 기도는 우리에게 사랑의 행위를 하도록 충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웨슬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기도는 행위에 앞서고, 행위에 침투하며, 행위를 뒤따른다. 반면, 이것은 웨슬리가 말한 “나쁜 결과”가 될 수도 있는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는 없애버리고, 마치 전적으로 우리가 한 것 인양 행위에만 우리의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깊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행위는 그 자체가 일종의 기도인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즉시 세상과 하나님을 향하게 한다. 따라서 기도로써 하나님께 행위를 드림은 세상을 향한 사랑 안에서 그리고 세상을 향한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 행위의 목적의 완성인 것이다.......기도는 행위로 나오고, 행위는 기도로 나오는 것이다.

     

      웨슬리의 이와 같은 기도와 행위의 이해는 본회퍼의 이해와 다를 바 없다. 본회퍼에게 기도는 “자신의 뜻을 완전히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은 오직 행위로써만 된다.”고 하였다. 본회퍼는 말하길, “나는 하나님이.......성실한 기도와 책임 있는 행위를 기대하시고 거기에 응답하시는 줄 믿는다.”라고 하였다.

     

    2. 두 번째로, 웨슬리와 본회퍼가 이해하는 기도는 곧 성화이다. 수하키는 “성화의 삶은 확실히 기도의 삶”이라고 하였다. 이후정은 “웨슬리에게서 기도의 길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사랑으로 일치하는 성화의 길이다.......기도는 회개와 애통과 눈물 속에서 십자가의 자기부인을 통해 정화되어야 한다. 이러한 기도와 실천은 웨슬리에 따르면 자기포기와 죽음, 그리고 부활에 동참함으로써 주님을 좇는 헌신적인 제자의 삶의 본질이다.”라고 하였다. 웨슬리에게 기도는 제자의 삶의 본질 곧 성화의 삶인 것이다. 또한 웨슬리에게 기도는 개인의 성화뿐만이 아니라 사회와 국가를 변혁시키는 사회적 성화의 원동력인 된다. “기도는 한 사회로써의 교회를 변혁시켜 사회 안에서의 변혁 원동력으로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본회퍼에게서의 기도의 삶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화의 삶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값비싼 은혜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함이다. “예수의 영광의 모습을 지니고자 하는 자는 세상에서 부끄러운 십자가의 형상을 져야 할 것이다. 인간이 되어 십자가를 진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지 않고서는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찾을 사람은 없다.” “이 십자가의 힘으로 성화의 열매는 자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본회퍼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날마다 생생히 반복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의롭다함을 받은 자의 생활을 세상 끝 날까지 유지할 은사도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유지되는 생활을 성화라고 일컫는다.” 또한 본회퍼는 교회의 가시성이 성화의 표지로 보고, 교회의 정치적 성화를 주장한다.

     

    교회는 하나님이 지상에 세운 산 위의 성 폴리스이요, 하나님이 봉한 그의 소유인 때문에 그의 ‘정치적’ 성격은 무조건 그의 성화에 속한다. 그의 ‘정치적 윤리’는 그 근거를 오직 성화에서 가지므로 세상은 세상이요, 교회는 교회이나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에서 온 땅에 퍼져 땅과 그 속에 있는 만물이 주님의 것임을 알게 한다. 이것이 곧 교회의 ‘정치성’이다. 개인의 성화가 만일 세상에 대한 교회의 이 가시적 한계를 보지 못하고 넘어가면, 종교적 육체의 경건하려는 욕망과 하나님의 보증(성령)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작용하는 교회의 성화를 뒤바꾸는 일이다.

     

      이와 같이, 웨슬리와 본회퍼는 비록 그들의 삶의 자리가 다르지만 기도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화의 추구로 이해함을 볼 수 있다. 한편 기도의 삶의 자리가 다르기 때문에 웨슬리는 사회적 성화, 본회퍼는 정치적 성화를 강조하는 차이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3. 본회퍼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형식이 아니라 내용임을 보여주었고,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곧 실천임을 보여주었다. 본회퍼에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기도해야 하는 것과 사회 속에서 정의를 행하는 것이다. 본회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을 자신의 삶에서 재현해 낸 사람이었다. 본회퍼의 기도의 삶을 통해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을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로 그동안 우리는 나눔의 기도를 실천하지 못했다. 모으는 기도만 한 것이다. 나와 내 교회를 위한 기도를 통해 성장을 지향해 왔다. 문제는 대부분의 경우 성장 한 후 나눔에 인색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역 사회에서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를 보이는 교회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십자가의 삶은 나눔과 섬김의 삶이다.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들을 위한 교회로 모든 교회가 거듭나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하는 말씀의 묵상이 한국 교회 공동체에게서 많이 실천되지 못하였다. 듣고만 있는 수동적인 기도 내지는 통성기도에 수동적으로 참여하는데 머물렀던 것이다. 이로 인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뜻을 살피며, 그 말씀이 나에게 육화되는 성령의 체험이 부족했다. 은사 체험을 성령 체험과 동일시 했다. 인격과 기질의 변화를 위한 성령 체험에 무관심했다. 기실 기독교의 구원은 성령을 통한 영혼의 변화일진대, 한국교회는 이를 먼저 구해야한다.

     

    21세기 한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것처럼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실현될 수 있도록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하고, 말씀 묵상을 통한 기도의 실천으로 타자를 위한 교회의 존재로 거듭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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