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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밝히 보게 하소서.
    교회력에 따른 본문 중심 설교 2009. 7. 23. 23:41

    성령강림 후 제7주[20090719]

     

    밝히 보게 하소서.(막 8:22-26)

     

    예수님은 제자들의 영적 무지와 믿음 없음에 안타까워하시면서 달마누다 지방을 떠나 벳새다에 이르십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벳새다라는 도시에도 한 영혼을 만나기 위해 들어가십니다. 예수님이 벳새다에 들어가신 이유도 한 영혼을 위한 구원의 계획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지요. 오늘 우리는 이름 없는 맹인 한 사람을 주목하고자 합니다.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벳새다 도시에 이르자 사람들은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옵니다. 그 사람들의 속셈은 소문에 듣던 예수라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 보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에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맹인의 손을 잡고 함께 마을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센세이션날리즘에 영합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맹인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복잡하고 화려한 벳새다 도시를 벗어나 한적한 곳으로 맹인을 데리고 나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눈 먼 사람이 눈을 떠서 보는 법을 배우기 이전에 먼저 그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맺으시는 것을 봅니다. 마을 밖으로 나가는 동안 눈보다 먼저 손을 만지시며 영적 교감을 나누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자의반타의반 사람들에 이끌려 왔지만 예수님은 분명 본인의 믿음을 보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를 위로하였을 것입니다. 보지 못하는 그의 고통에 함께 아파했을 것입니다.

     

    나도 네 마음 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맹인이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 했는지, 사고로 그랬는지, 가정 형편은 어땠는지, 부모가 자신을 버렸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은 그와의 대화를 통해 먼저 그의 마음을 만져주십니다.

     

    미국의 유명한 토크쇼 진행자 오프라 윈프리가 있습니다. 오프라 윈프리 쇼는 미국에서 매일 1,400만이 시청하는 인기 프로그램입니다. 왜 이렇게 인기 있는가하면? 진행자 오프라 윈프리는 1954년 미혼모의 아이로 태어나 수많은 고생을 경험했습니다. 지독한 가난을 겪었고, 성폭행, 실패, 배신 등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슴 아픈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것이 그녀에게는 부끄러운 경험이었지만 토크 쇼를 진행해 보니 많은 출연자들이 자기와 같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스트레스 때문에 폭식하여 비만증에 걸린 여인이 출연하면, “나도 한 때 스트레스 때문에 폭식한 적이 있습니다.” 마약 중독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연인이 출연하면, “나도 과거에 마약을 한 적이 있습니다”라고 위로합니다. 성폭행 경험으로 괴로워하는 출연자에게는, “나도 어렸을 때 성폭행 당한 적이 있습니다.” 윈프리의 이러한 감정의 공유가 출연자와 시청자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사람도 사람의 아픔을 공유하면 마음이 위로받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그런데 죄 없으신 예수님은 어떠하십니까? 그분은 죄가 없으시지만 죄 많은 우리를 기꺼이 받아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아픔을 들어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육체가 고침받기 이전에 먼저 우리의 내면이 치유받고 회복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한 아주 중대한 의미가 숨어있는 말씀입니다. 구원이란 내면의 변화이지 결코 외형의 변화가 아닌 까닭이기 때문입니다.

     

    병에서 고침 받거나, 불구의 몸이 정상으로 회복되는 것도 은혜이지만 그것이 곧 구원의 전부는 아닙니다. 요즈음 얼굴을 예쁘게 만들기 위한 성형 수술만 해도 얼마나 발달했습니까? 한 사람이 질병에서 고침 받고, 외적 상처가 낫는 것도 큰 기쁨이지만 내면이 평화를 누리고, 영혼이 구원받는 것은 이 땅에서 경험하는 가장 큰 복이 됩니다.

     

    구원은 마음의 변화입니다. 오늘 본문의 앞의 단락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의 믿음 없음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책망하셨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것, 보지 못하는 것은 모두 같은 의미로, 마음의 변화가 없는 완악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복음을 듣고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딱딱한 마음, 둔한 마음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일 이전에 맹인 자신이 자신의 내면을 관찰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단순히 그의 아픔에 공감하며 그를 위로하는 차원을 넘어서 나아가 그 안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아픔으로 가려진, 두려움으로 공개하기를 겁내하는 자신만의 어두움을 벗어버리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자신의 내면을 관찰해보니 그는 아픔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아픔으로 인해 쌓였던 누군가를 향한 원망, 분노, 증오도 보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겉으로 보기에는 좀처럼 알 수 없고, 드러나지 않는 감추어진 어두움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타인으로부터 공격받고, 상처받았다고 그것만 치유 받으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상처로 인해 이미 그 안에 더 큰 독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폭력성, 음란성, 온갖 악독과 속임으로 자리 잡고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가면 속에 숨겨진 우리 안의 어두움의 진실입니다.

     

    이 맹인은 예수님의 첫 번째 터치로 마음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터치와 기도로 육의 눈이 떠졌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 맹인의 두 번째 눈이 떠지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그 눈에 다시 안수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세 번째 터치와 기도로 그는 자신의 내면을 직시하는 영의 눈이 떠졌습니다. 자신의 내면을 숨기고자 하는 두려움에서 예수님은 먼저 그의 두려워하는 마음부터 없애신 후에 자신의 모습을 밝히 보게 하십니다. 자신의 내면의 진실을 직시하는 영의 눈이 열린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모든 것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그 느낌 자체를 없애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무의식적으로 이런 어두움의 모습에 대해서 드러내는 것 자체가 자신을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스스로 감추려고 합니다.

     

    본문은 우리 안에 이런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밝히 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어느 것도 우리를 해치지 않습니다. 실상은 어두움이 드러나지 않을 때 그것이 우리를 해칩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 앞에 드러날 때 주님은 우리를 온전히 치료해 주십니다.

     

    호세아 6장 1절에,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주님 앞에 나아가 자신의 어두운 죄악, 죄성,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드러낼 때, 주님은 그 상처를 온전히 치료하시고 그 환부를 감싸주십니다.

     

    예수님이 두 번씩이나 맹인의 눈에 안수하신 것은 두 번에 걸쳐 비로소 육의 눈을 뜨게 하신 사건이 아닙니다. 육의 눈을 뜨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마가복음은 제자의 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영의 눈, 무엇보다 자기 내면을 보는 눈, 특별히 자신의 어두운 면을 감찰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자신의 어두움을 발견하고 부단히 그것을 죽이고, 절제해 나갈 때, 진정으로 깨어 있는 상태에 이르고, 온전한 구원을 이루어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밝히 보는 깨어남의 은혜가 있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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