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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예수님의 수난
    교회력에 따른 본문 중심 설교 2011. 4. 24. 16:16

    종려주일[20110417]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예수님의 수난
    (마 26:47-56)

    오늘은 사순절의 마지막 주일로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여 종려주일이라고도 부릅니다. 이날 백성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나귀 타고 오시는 메시아를 찬양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마 21:9)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호산나’ 즉 ‘구원하소서’라고 외쳤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구원자로 기대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특이하게도 나귀를 타고 입성하십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는데 선지자 스가랴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마 21:5)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천국에 들어가기 합당한 삶을 살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 7:21). 무엇보다 그것은 율법을 초월하는 것이 아닌 율법을 온전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형식과 위선의 율법 준수가 아닌 율법의 본래의 의미를 깨닫고 준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에 합당한 삶을 여러 비유로 설교하시며 결국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으며 그것이 곧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삶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예언의 말씀을 이루며,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십니다. 군중들의 눈에는 화려한 입성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를 지시는 고난의 길로 들어서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속한 마태복음 26장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사건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시고, 마태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고, 적대자들에게 붙잡히는 사건, 이것은 입성 후 목요일 하루 밤 사이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이제 오늘의 본문을 생각해 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후 연이어 일어나는 사건으로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을 잡는데 앞장 선 가룟 유다는 누구입니까? 우선 가룟이라는 지명은 헤브론에서 남쪽으로 20km 떨어진 그리욧 헤스론(수 15:25)입니다. 즉 유다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홀로 유대 지방 출신인 셈입니다. 그리고 그는 제자가 된 후 예수 공동체에서 재정 관리를 맡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신임을 받았으며, 똑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왜 예수님을 배반했을까요? 예수님은 그를 믿고 재정까지 맡겼지만 유다는 생각이 달랐던 것입니다. 그는 열심당원 출신으로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자신의 스승이 이스라엘의 독립에 앞장서기를 학수고대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정치적인 활동은 멀리하셨고, 스승을 통해 내심 기대했던 자신의 바람은 이루어질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예수님은 잡히시기 이틀 전, 제자들에게 천국 설교를 다 마치시고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마 26:2) 가룟 유다는 더 이상 믿고 따를 이유가 없다고 결심하고, 차라리 한 몫 챙기고 가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는 무리를 빠져나와 대제사장들과 음모를 짜고 은 삼십을 받았습니다(마 26:15). 예수님께서 제자 세 명과 함께 겟세마네에 기도하러 갔을 때 그는 다른 작업을 하러 갔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마치신 후 자신의 때가 가까이 왔음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마 26:45)

    예수님의 목적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비단 가룟 유다뿐 만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제자의 도를 가르치시면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 16:24)고 말씀하실 때만 해도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제자의 도를 깨닫지 못한 채 하나님의 일에 대해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마 16:23).

    그런데 예수님은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라”(마 26:56)는 말씀을 하시며, 순순히 그들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는 것이 수난의 시작입니다. 역설적으로 수난은 예언의 성취를 마무리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말씀의 성취요, 예언의 성취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결정적인 사건을 기록할 때마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마 26:56)라고 표현합니다.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자기의 목숨만을 건지려는 배신의 길을 택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친구라고 부르기를 원했지만 그들은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친구보단 자신의 목숨을 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요? 제자들은 모두 떠나버렸습니다. “범죄자 중 하나로 취급받는”(사 53:12) 상황에서 제자들의 배신은 예수님께 인간적인 비통함, 외로움, 슬픔을 던졌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을 미워하신 것이 아니라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의 배신에 대해 말이나 행동으로 원수 삼지 않으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군병들과 함께 와서는 예수님께 나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하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유다의 입맞춤은 “원수의 입맞춤”(잠 27:6)이었고, 위선의 입맞춤이었습니다(마 26:49).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반응했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주목해 보기를 원합니다.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마 26:50)

    예수님께서 응답하신 ‘친구여’는 어떤 의미일까요? 예수님은 배신자 가룟 유다에게 사랑의 마음으로 친구라고 불렀을까요? 아니면 내가 너를 친구라고 부르겠다고 한 의미를 깨달으라고 친구라고 불렀을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요 15:15)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 전에 하신 말씀이 더 중요합니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4) 예수님은 조롱하듯, 기만하듯 다가오는 유다에게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훨씬 인간적으로 대답하십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유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께서 자신이 말한 의미의 그런 친구가 되라는 뜻도 숨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시며 유다의 이중적인 행위를 보고 솔직하게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다에게 이 말씀을 미처 마치시기도 전에 군인들은 예수님을 붙잡았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가운데 왕이 딸들에게서 따돌림을 받고 난 다음에 하는 말이 “배신당하는 것은 죽음보다 쓰린 것이다”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신 그 모습을 볼 때 쓰라린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게 보여주는 모습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진리를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전파하신 천국 복음은 목자 없는 양 같이 고생하는 자, 병들고, 소외되고, 약한 자들에게는 초대의 복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비로소 자신의 고난과 죽음, 부활을 말씀하실 때(마 16:21)에는 이 초대의 복음만이 전부가 아니라 고난의 복음도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마 16:24).

    지금까지 예수님은 천국의 도래를 선포하시며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삶과 제자의 도를 가르치셨고,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것이 마태복음 26장입니다. 그것은 죽음을 앞둔 예수님 자신이 느끼는 뭔지 모를 두려움과 위협 같은 전율의 분위기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제자들을 향한 마음은 배신도 각오하는 조건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배신하는 유다에게 ‘친구여’라고 끝까지 사랑의 표현을 쓰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붙잡으려고 달려들었던 말고(요 18:10)의 떨어진 귀도 다시 낫게 해주셨습니다(눅 22:51). 예수님은 대상이 누구든, 상대방이 어떻게 나오든 가장 큰 계명을 지키십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칼을 든 제자를 만류하시며 폭력 사용을 금하십니다. 이 점을 얼마나 강조하시는가는 하늘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어도 안하신다는 대목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 26:53) 예수님은 지금 당장 엘리야처럼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할 수도 있고, 그 보다 더 강한 7만 2천 명의 천군도 동원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를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성경은 이사야 53장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사 53:7, 9)

    예수님은 예언의 성취를 위해 무력과 폭력 사용을 반대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깨달음을 줍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미명 아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되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근본 하나님의 본성적인 사랑과 용서가 수단입니다.

    예수님에게서 희생이란 죽음 이전에 헌신이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마 26:56) 예수님께서는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라고 기도하신 것처럼 이미 겟세마네에서 온 몸의 기운을 짜내듯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결심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눈앞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 예수님이 잡히시면서 까지 제자들에게 보여주시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홀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갑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것이고, 자신의 소명에 끝까지 헌신하신 것입니다. 온 인류의 죄악의 무게를 담은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 우리를 사랑하는 일이라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아버지께 버림받는 참담함과 비통함도 경험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이미 겟세마네에서 죽으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온 인류의 죄가 담긴 잔을 드시며 자신이 먼저 십자가에 오르신 것입니다. 이것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님의 모습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붙잡히시면서 까지 보여주신 사랑은 배신자, 위선자, 자신을 팔아넘긴 자까지도 무조건 용서하시는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실패자, 행악자까지도 사랑하시며, 그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우리는 인류에게 위대한 교훈을 남긴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압니다. 인류에게 감동을 주고, 희망을 주고, 명언을 남긴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온 인류를 위해 목숨을 버린 사람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배신한 제자들에게 끝까지 보여주신 사랑,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죽기까지 순종하신 삶을 고난 주간 묵상하며 우리도 예수님처럼 실천해 나갈 수 있게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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