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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음의 성전을 세우자.
    교회력에 따른 본문 중심 설교 2009. 3. 15. 17:36

    사순절 제3주[20090315]

     

    마음의 성전을 세우자(요 2:13-22)

     

    예수님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는 이적을 행해 보이시고, 가버나움으로 이동하십니다. 그곳에서 며칠 머물지 않고, 다시 예루살렘까지 먼 거리를 여행하시는데, 유월절을 지키기 위함이셨습니다. 13절,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을 기념하는 절기로 일주일간 예루살렘 성전에서 성대한 제사를 치루게 됩니다. 성전 안은 제사장의 뜰, 유대인 남성과 여성 그리고 이방인의 뜰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이방인의 뜰에서는 성전에 쓰일 소나 양, 비둘기의 매매를 허용하였고, 성전 세를 드리기 위해 환전하는 곳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 이방인의 뜰에서의 모습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시고, 양과 소를 성전에서 내쫓으셨습니다. 그리고 환전하던 상을 뒤엎으셨습니다. 15절, 16절을 보시겠습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예수님은 원래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분으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랑으로 가득차고 다정하신 분, 화를 전혀 낼 줄 모르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노하시고, 분이 나셨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렇게 예수님을 노하게 만드셨을까요?

     

    이 장면은 조금 전의 가나의 혼인잔치 때 물을 포도주로 바꾼 사건과 상당히 대조적입니다. 하나는 축복의 사건이요, 하나는 심판과 경고의 사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한복음의 첫 머리에 축복의 메시지를 던지시고, 바로 이어 민망하게도 성전 정화 사건이 기록된 이유는 무엇일까? 마태, 마가, 누가는 성전 정화 사건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있었던 일로 기록했는데, 요한복음은 왜 공생애 초기에 있었던 일로 기록했을까? 그것은 저자 요한의 의도, 곧 말하고자 하는 중요한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 2장을 통해 굉장히 중요한 진리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인류의 구원자이신 메시야에게 두 가지의 모습이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그분은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그분은 불의의 심판자요, 거짓과 탐욕에 대해서는 진노의 채찍을 드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에 대해 너무 낭만적이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너무 쉽게 얻어진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사랑과 용서,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은혜에 보답하지 못할 때에 그것은 분노요, 심판이요. 채찍이라는 사실을 요한은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입니까? 무조건 죄를 덮어주는 것만이 사랑이 아닙니다. 죄가 있는데 말 안해주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상대의 죄와 허물을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에는 희생이 따를 수 밖에 없고, 사랑의 반대를 무관심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죄 용서받음은 믿는다고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희생의 대가가 있었음을 체험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만민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이전에 죽음의 쓴 잔을 마셔야만 했습니다. 십자가의 승리 이전에 십자가의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오늘 성전 정화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먼저 우리는 예수님이 성전에서 내쫓으신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보고 분을 내시고, 뒤엎으셨는데, 분을 내신 그 근본 이유는 예배의 경건성, 신앙의 간절함을 잃어버린 당시 유대인들의 불신앙에 기인합니다.

     

    하나님의 집인 성전에서 제사라는 명목 하에 행해졌던 매매 행위는 원래의 취지를 벗어나 제사장들과 판매상들의 유착으로 인해 돈 벌이의 수단으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제사 보다 젯밥에 관심하는 제사장들의 타락이 거룩한 기도의 장소를 흥정하는 장터 수준으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이방인의 뜰도 분명 이방인들이 기도하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짐승 값의 10배에서 20배나 부풀려 폭리를 취하고, 15% 이상의 환전 수수료를 챙겨먹는 장사꾼들의 배 채우는 소리에 거룩한 기도처는 천박한 시장터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격노하신 이 모습에 대해, 17절에 기록된 훗날 제자들의 증언은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는 말씀입니다. 다른 번역을 보면, “주님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이 나를 삼킬 것이다”(새번역), 혹은 “My love for your house burns in me like a fire”(CEV)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우리는 성전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열심을 이 대목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따라 해마다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습니다. 12살 때 예수님은 성전에서 가르치는 사람들과 토론을 하고 있었다고 누가복음 2장에서는 증언합니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예수님은 동일하게, 성전을 가리켜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전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 성전의 주인이 자신들이라고 생각한 제사장들은 성전을 자기의 배를 불리는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해 먹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격노는 바로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해야 할 성전이 인간들의 탐욕으로 물든 모습에서 나온 거룩한 분노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화내야 할 대상은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으로 사람을 때린 것이 아니라 소의 엉덩이와 상을 때리신 것은 부패한 인간의 마음을 깨우치시고자 하신 행동입니다. 소와 양, 비둘기는 인간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불신앙의 근원을 상징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소는 우리를 지배하는 왕성한 정욕과 성욕을 상징합니다. 우리 안에는 양들이 있는데, 이는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부자유를 상징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비둘기들은 우리 마음을 이리저리 푸득거리게 만들며 좀처럼 안식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생각을 상징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돈 사랑은 여전히 먹고, 마시고, 입는 일에만 관심하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쫓아내신 것은 바로 소와 양, 비둘기, 돈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안에 있는 육신의 정욕, 죽음에 이르는 중독, 세상 근심, 물질의 노예와 같은 부패한 마음이 청소될 때,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거룩한 성전이 될 것입니다(고전 3:16). 그럴 때 비로소 우리 마음은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가 될 것이고,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시내산, 평화와 기쁨이 샘솟는 동산이 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친히 자신의 몸으로 성전을 온전히 회복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의 불신앙은 하나님 없는 삶, 탐욕으로 물든 삶으로 나타났습니다. 화려하고 웅장한 헤롯의 성전은 있으나 그 안의 참된 예배는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채찍이 그들의 타락한 본성에 일침을 주었으나 그들은 여전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여주겠느냐?”고 따져 묻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불신앙의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나 심지어 예수님 곁에 서있던 제자들도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언제 이 말씀을 제자들이 믿게 됩니까? 22절을 보십시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서야 제자들도 이 말씀의 뜻을 깨닫고 기억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21절의 “예수님은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는 이 말씀은 예수님에게 대항하던 당시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고, 그 때 제자들이 깨달은 말씀도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말입니까? 바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요한의 위대한 신앙 고백입니다.

     

    요한이 누구입니까?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예수님이 무덤에서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제자들 중 제일 먼저 무덤에 달려간 사람입니다. 요한은 십자가 곁에서 예수님의 찢기심과 가쁜 숨소리 그리고 마지막 유언을 들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순간, 자신에게 부탁하신 한 말씀을 기억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를 부탁한다는 말씀입니다.

     

    요한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요한은 예수님의 죽음이 온 인류를 향한 사랑이었음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서서히 고통 가운데 죽어가셨을 때, 요한 자신도 주님과 함께 마음의 십자가를 졌음이 분명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난 후 어느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고통을 회상하며 가슴 아파하고 있을 때, 갑자기 언젠가 성전에서 채찍으로 청소하시며 외치시던 주님의 음성이 기억났을 것입니다. 이 두 장면이 오버랩 되며 토해내는 요한의 위대한 고백이 바로, “예수님의 몸이 곧 성전이셨구나!”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제물 삼아 영원한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몸을 통해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요 14:6). 예수님은 “내 살을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피를 마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6:53).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희생하심으로 친히 타락한 예루살렘 성전을 회복하셨습니다.

     

    오늘로 사순절기 셋째 주간이 시작됩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안에 잘못된 성전관이 있다면 회개해야 하겠습니다. 벽돌로 만든 화려한 헤롯의 성전이 참된 성전이 아닙니다. 성전은 더 이상 하나님을 가두어 놓은 곳이 아닙니다. 성전을 만드신 분이 성전 보다 더 크십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의 성전이 되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 되시며 마지막까지 모여주신 모습은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 희생이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모신 내 마음이 주님의 거처가 되십니다. 그렇다면 이제 내 마음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것이 아들을 죽기까지 내어놓으시면서까지 이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는 방식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 그 일만이 우리 안에 일어나길 원합니다. 아버지 집을 사랑하는 열심, 그것이 우리 안에서 타오르기 원합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인 줄 믿습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 한 장 한 장 믿음의 벽돌을 쌓아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 사랑의 성전을 건축해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몸으로 생명을 살리는 축복의 성전을 세워가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우리의 성전입니다. 예수님을 모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의 거룩하고 순결한 성전이 회복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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