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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윌리암 로의 신비주의
    성경적 구원의 길 2008. 1. 4. 00:51

    윌리암 로의 신비주의(Mysticism in William Law)

    -존 웨슬리와 비교하며-

     

    이 관 수


     
     

    Ⅰ. 들어가는 말

    존 웨슬리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관한 평이한 해설 이라는 논문에서 자신이 23세 되는 해, 1725년에 Taylor 감독의 Rules and Exercises of Holy Living and Dying을 읽고 의도의 순수성(purity of intention)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1년 뒤인 1726년 Kempis의 Christian's Pattern 을 접하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할 것을 결심한다. 또한 의도의 단순성(simplicity of intention), 감정의 순수성(purity of affection)을 강조하며, 이 둘은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영혼의 두 날개와도 같다고 하였다. 이후 1년 또는 2년 뒤, (또는 1730년으로도 볼 수 있는데) Law의 Christian Perfection Serious Call 을 손에 넣고, 반쪽짜리 그리스도인(half a Christian)이란 있을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으며, 모든 영혼과 몸과 정성을 다 바쳐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결심한다. 1725년 이후 4-5년간은 웨슬리에게 중요한 시기로 막심 삐떼(Maximin Piette)나 엄프리 리(Umphrey Lee)같은 경우 이 시기를 웨슬리의 회심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이렇듯 웨슬리는 토마스 아 켐피스, 윌리암 로 등 신비가들의 저서를 읽고 많은 변화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웨슬리는 1732년 11월과 1735년 10월, 두 차례나 윌리암 로의 Christian Perfection 을 읽었으며, 1738년 회심 전 1730년 12월과 1736년 8월, 두 번에 걸쳐 Serious Call 을 읽은 것으로 그의 일기를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소논문은 적어도 1738년 회심 전까지 웨슬리에게 큰 영향을 미친 윌리암 로의 A Practical Treatise on Christian Perfection (1726)과 A Serious Call To a Devout and Holy Life (1728)를 소개하면서 윌리암 로의 신비주의 사상을 살펴보고, 존 웨슬리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는데 그 목적을 두고자 한다.

     

     

    Ⅱ. 윌리암 로의 생애와 저작들

    윌리암 로(1686-1761)는 1686년 영국의 노드햄턴셔(Northamptonshire)에서 태어났다. 1705년 Cambridge의 Emmanuel College에 입학했고(B. A. 1708, M. A. 1712), 1711년에는 안수를 받고, Emmanuel College에 교수(Fellow)로도 선출된다. 그러나 1714년에 Queen Anne이 죽은 후 당시 국왕으로 취임한 George Ⅰ세에 대한 충성 서약을 거부함으로 비국교도(Non-Juror)가 된다. 그 후 로는 10년 동안 Edward Gibbon 가(家)의 개인 교사(private tutor)로 일한다. 1740년 그는 King's Cliffe로 돌아와 그곳에서 글을 쓰는 일과 자선 사업을 하며 여생을 보낸다. 또한 그의 후기 삶은 야곱 뵈메(Jakob Boehme)의 열광적인 제자가 된다.

    로는 18세기 영국에서 실천 신학(practical divinity)에 대해 뛰어난 저자로 알려져 있으며, 비록 세속적이고, 이성적인 시대에 살았지만, 참 신비가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저작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A Serious Call To a Devout and Holy Life (1728)가 있다. 이외의 그의 작품을 년도별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Three Letters to the Bishop of Bangor (1717-19), A Practical Treatise on Christian Perfection (1726; 이 논문은 존 웨슬리에 의해 부분적으로 축약되어서 1740년에 출판된다), The Grounds and Reasons of Christian Regeneration or The New Birth (1739), An Appeal to All That Doubt the Truths of the Gospel (1740), The Spirit of Prayer, PartⅠ (1749), PartⅡ (1750), The Way to Divine Knowledge (1752), The Spirit of Love, PartⅠ (1752), PartⅡ (1754), An Humble, Earnest, and Affectionate Address to the Clergy (1761)

     

     

    Ⅲ. A Practical Treatise on Christian Perfection (1726)

     

    An Exhortation To Christian Perfection

    1. 그리스도인의 완전

    이제 나는 독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추구하라고 권면하는 일만 남았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추구하라는 권면을 받을 때, 그가 그것이 자신에게 무슨 유익이 있냐고 묻는다면, 다음의 답변을 준비하면 좋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그에게 영원함의 유익을 줄 것이며, 헛되고 불행한 상태에서 구원으로 이끌며, 동물적인 삶의 천한 즐거움에서 들어올려지고, 죽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영광스런 몸이 주어질 것이며, 천사들과 천상의 존재들 가운데서 영광 받으며, 완전한 영원함을 위한 무한한 행복으로 가득차게 될 것이다.

     

    2. 완전의 필요성

    당신이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추구하라고 권면 받을 때, 당신은 구원의 확신을 권면 받음을 기억하여야 한다. 당신은 또한 당신의 완전을 판단할 다른 잣대가 없고 오직 그것에 도달하기 위한 성실함과 충만함의 노력이 있을 뿐임을 기억하여야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성결의 크기와 넓이를 사랑의 예로써 판단할 수 있다. 이 미덕은 다음과 같이 묘사되는데, “사랑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7)

     

    사도는 그리스도인의 사랑 안의 이 완전이, 심지어 순교조차도 그 부족함을 보상하기에 부족할 만큼, 구원에 필수적임을 우리에게 명백히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더 이상 완전을 추구함이 우리의 구원을 추구함임을 확신시킬 다른 논의가 필요한가? 여기에서 말하는 사랑이란 모든 다른 덕의 이해로 여겨져야 하며, 이 사랑과 같은 마음의 충만함과 성실함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이 사랑은 거룩한 태도와 그 근거로서의 많은 다른 덕이 요구되며, 성결의 훨씬 진보한 마음에 의해서만 훈련될 수 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모든 본질은 변해야만 한다. 우리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한다. 우리는 세상을 극복하고, 믿음으로 살아야 하며, 이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성령의 충만함으로 살아야만 한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데에는 오직 “작은 문”과 하나의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이 있을 뿐이며, 천국으로 들어가고자 몸부림치는 사람 외에는 어느 누구도 들어갈 수 없다. 만약 당신이 노력하지 않고, 주께서 요구하시는 조건들에 게으르고, 당신의 힘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수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만약 당신이 지금 완전을 향하여 자신을 헌신하려 한다면, 당신은 몇몇 친구와는 멀어져야 하며, 어떠한 관계는 버려야 하며, 어떤 계획들은 포기해야 하며, 어떤 기쁨은 삼가야 하고, 당신의 삶을 바꾸어야만 한다. 아니, 이 보다 더 해야 할지도 모른다. 당신은 친구들의 미움에 노출될 것이며, 교활한 조롱자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고, 세상 사람들의 경멸과 조롱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완전하지 못하고 죽는 것보다, 영원한 영광의 집에 들어갈 준비가 되지 못한 것보다 이를 행하고 고난 받는 것이 더 낫지 않는가?

     

    일요일은 매우 따분하고 지루한 날이 되어 버렸다. 신성한 예배가 아니라 오히려 정장을 하고, 방문을 하는 날이 되어버렸다. 공적인 예배를 지키는 것에 관심이 없어졌고, 예배를 끝나기만 바라고 즐거워한다. 이것이야 말로 반쪽 경건(half-piety)의 상태이다. 세속적인 삶에다 종교만 덧붙인 것이고, 그들의 종교는 단지 멍에요 짐이다. 시간은 없고, 단지 때우기 식인 것이다.

     

    Ⅳ. A Serious Call To a Devout and Holy Life (1728)

    1. 경건의 본질과 범위

    경건은 하나님께 드려지고 바쳐진 삶을 의미한다. 더 이상 자기의 뜻이나 자기의 방식이나 세상 정신을 따라서 삶을 영위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삶을 영위하는 사람이 경건한 사람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전적으로 하나님만 바라보지 않는 한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것은 우리가 모든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살지 아니하거나 하나님이 우리 삶의 모든 방면에서 원리나 척도가 되지 아니하는 한, 하나님을 위하여 산다고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

    사실 기도는 지혜롭고 고상하고 하늘의 영광을 지니게 하면서도 정작 허무하고 어리석은 삶을 영위하는 것, 곧 기도는 하면서도 일하는 것이나 노는 것이나 시간을 보내고, 돈을 사용하는 어떤 것에는 기도할 때 지닌 지혜와 하늘의 특성에 부합되지 않는 삶을 영위하는 것처럼 그 자체로 무모한 것이 없다.

    삶의 일상적인 행동들을 지배하는 신앙의 의무나 경건에 대하여는 성경의 모든 구절에서 발견된다.......우리 주님의 교훈 중에서 공중예배에서 어떻게 하라는 말씀은 하나도 없다. 반면에 복음서의 페이지마다 “우리 삶의 일상적인 의무들”에 대한 명령이 언급되고 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면, 매일 매일의 일상적인 삶의 방식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라야 하는 것이다.

     

    2. 경건을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

    나는 어째서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경건하지 못한가?.......순전히 내가 철저하게 그러한 삶을 살 의도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분명하게 상 주실 삶의 방식으로 열심을 다하는 것이 바로 그 사람의 의도이기 때문이다.

    이 교훈은 그리스도인의 일반적인 삶 속에서 진정한 자기 부인과 진정한 자기 제어, 탁월한 사랑과 심오한 겸비함과 천상적인 감동과 세상을 진정으로 경멸함,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온유,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열심, 탁월한 경건심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덕행을 철저하게 이행하고 본을 보이겠다는 의도를 가질 정도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가르친다.

     

    3. 경건에 대한 마음의 부족

    우리는 하나님을 천사들과 같은 정도로 섬길 수는 없다. 완전한 상태에 있는 사람같이 그를 순종할 수는 없다. 그러나 타락한 사람들이라도 최선을 다할 수는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완전함이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여 온전하여지려고 면밀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만이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의 온전이다.”

     

    4. 참된 경건의 마음

    어느 장소에서 어떤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 드려진 삶이 진정한 경건이다.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하고, 사람들은 자기들의 여러 가지 지위와 직업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행동하여야 한다.

    그러면 그렇게 하기 위한 오직 유일한 길은 무엇인가 알아보자.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사업상의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마땅히 바쳐 들여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마땅한 의무라고 여기는 자세로 그 일을 할 때에만 비로소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아울러 해야 한다.

    우리 삶의 모든 과정에서 온유하고 낮은 마음을 가지게 할 정도로 겸비한 심령으로 겸손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옷 입은 것이나 대화에서나 사람됨에서 우리의 마음 쓰임이나 세상에 대한 자세나 손해를 당하고 인내하는 면에서나 위에 있는 자에게 복종하는 자세에서나 우리보다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으스대지 아니하는 면에서나 우리 삶의 외적인 모든 행동에서 다 드러날 정도로 겸손해야 한다.

     

    5. 경건과 시간 사용

    당신이 마땅하게 할 의무는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종들을 본받아야 하는 것이다. 가장 탁월했던 성도들이 삶을 어떻게 영위하였는가를 탐구하고 완전함에 이르는 모든 방식과 기술을 연구하고 그렇게 많은 복락을 주신 풍성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감사하는 일에 전혀 제한을 두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여러분 성도들에게 주어진 임무이다.

     

    6. 경건과 재물 사용

    우리가 우리의 재산을 신앙적으로 정확하게 사용해야 할 크고 중요한 이유들이 있다. 첫째, 그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그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할 아주 큰 수단이기 때문이다. 셋째, 우리가 가진 돈을 허비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사를 허비하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고, 선한 일을 하는 아주 큰 수단을 소용없게 만드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 자신에게 더 나쁜 해를 끼치고 있는 셈이 된다.

     

    9. 경건한 삶의 한 예

    만일 여러분이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위하여 살려 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를 따라서 삶을 영위하고 사물들의 본질과 가치에 대한 의로운 판단에 따라서 행동하여야 한다. 여러분은 거룩하고 하늘을 사모하는 열망을 행사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은사들을 하나님을 찬미하고 영광을 돌리는데 사용하여야 한다.

     

    10. 경건의 의무

    모든 삶의 부분이 보편적으로 거룩하고, 우리의 모든 행동들이 하늘의 지혜를 드러내고, 세상의 정신과 기질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세상에서 누리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 경건하고 헌신하는 수단들로 돌리는 것만이 기독교이다.

     

    16. 9시 기도: 겸손

    경건한 그리스도인은 이 시간을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도 행위를 새롭게 하라고 주신 시간이며, 은혜의 보좌 앞에 나오라고 부르는 시간으로 알아야 한다.

    영혼의 겸비한 상태가 종교 상태 바로 그것이기 때문에, 겸손이 경건에 대하여 생명과 혼이요, 모든 덕행과 모든 선행의 기초요, 모든 거룩한 열망의 가장 좋은 안전책이기 때문에, 나는 여러분에게 겸손이야 말로 아침 아홉시에 경건의 시간을 가질 때에 기도드려야 하는 부단한 제목이 되기에 합당하다고 권장한다.

     

    20. 12시 기도: 중보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7:12) 이것이 엄격한 공의의 교훈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부합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보편적인 사랑뿐이다. 사랑이 우리 자신을 향한 행동의 척도이듯이, 우리가 자신을 바라볼 때 가지는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같은 방식으로 행동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들이 다 행복하기를 원하신다. 비록 그것이 하나님 자신에게 하등 행복이 되지 못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되기를 소원해야 한다. 비록 그것이 우리에게 행복을 주지는 못해도 말이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의 완전을 동등하게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서 완전을 발견할 때 즐거워해야 한다.

     

    22. 3시 기도: 순종

    이 오후 시간에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 뜻을 이행할 필요성을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그 위대한 덕행을 기도의 주요 문제가 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존재 외에는 지혜롭거나 거룩하거나 의로운 존재가 없다. 지상에서 사람들의 일반적인 행동들이 하나님께 열납될 만한 봉사가 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23. 저녁 기도: 회개

    나는 이제 저녁 여섯 시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이 시간은 삶의 모든 상태의 수고와 행동이 일반적으로 끝이 나기 때문에, 그 날의 첫 시간부터 하루 일이 끝나는 이 시간까지 행한 모든 행실들을 점검하고 재고할 아주 좋은 시간이다.

     

    24. 경건의 위대함

    나는 경건이란 하나님께 헌신된 삶을 의미하고, 매일 기도의 규칙적인 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임을 의미하는 두 가지의 본질을 가진 것으로 설명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이르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바라는 바임은 모든 병든 자들이 완전한 건강을 회복하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여기서 강조한 모든 것은 위대하고도 엄격한 경건의 삶이다. 나는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의무와 행복임을 보여 주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영혼에는 지혜롭다거나, 위대하다거나, 고귀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단지 위대하신 하나님을 바로 알고 진심으로 경배하는 것이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모든 영혼들의 도움이며 생명이 된다.

     

     

    Ⅲ. 나가는 말: 존 웨슬리와 비교하며

    윌리암 로의 A Practical Treatise on Christian Perfection A Serious Call To a Devout and Holy Life에서 모두 공통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Serious Call에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하며, 경건의 본질은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life devoted God)이며, 규칙적인 매일 기도(regular method of daily prayer)임을 말하고 있다. 웨슬리는 1730년에서 1736년 사이 이 책들을 읽으면서, 마음과 몸과 정성을 다 바쳐 하나님께 헌신할 것을 결심한다. 따라서 윌리암 로의 글에서 나타난 신비주의 사상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며, 이것은 웨슬리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라는 개념이 윌리암 로나 웨슬리만의 고유한 사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확실히 이것은 당시 영국에서 흔히 쓰인 개념이다.

    웨슬리는 “완전 성결”(entire holiness)의 교리를 설명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보편적인 개념으로 차용하였다. 이밖에도 완전 성화의 의미로 웨슬리가 사용한 다른 용어는 “완전한 사랑”(perfect love), “완전한 구원”(full salvation), “완전 성화”(full sanctification),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the whole image of God) 그리고 “순수한 사랑”(pure heart) 등이다.

    이렇듯 윌리암 로나 웨슬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의 삶의 표현인 것이다.

     

    반면 J. Brazier Green의 저서 John Wesley and William Law (1945)를 보면 웨슬리와 로가 이해하는 “완전”에 대해서 서로 동의하는 점과 이견을 보이는 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비교, 정리하고 있다.

    A. 동의하는 점(agreements)

    1.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하심이다(Christian perfection is the purpose of God for all men).

    2. 완전은 잃어버릴 수도 있다(It can be lost).

    3.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에 있다(The goal is complete communion with God).

    B. 서로 다른 점(differences)

    1. 로는 개인주의적인 반면, 웨슬리는 사회적이다(Law's ideal was individualistic; Wesley's was social).

    2. 로는 세상 포기에 열중한 반면, 웨슬리는 세상을 섬기는 일에 부름 받았다(Law's involved world-renunciation; Wesley's called for service).

    3. 로는 내세를 위한 삶을 준비한 반면, 웨슬리는 내세뿐 아니라 현세를 위한 삶도 조화를 이룬다(Law's prepared men for the here after; Wesley's comprised also the present world).

     

    터틀은 웨슬리와 신비주의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로가 담당한 역할을 학자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로가 웨슬리에게 미친 영향은 크지만 그것은 올더스게잇 이전의 사건으로만 이해한다는 통상의 개념을 비판한 것이다. 터틀은 오히려 올더스게잇(Aldersgate)이 웨슬리로 하여금 신비주의의 찌끼는 버리고, 황금만을 건져내게 되는 계기로 해석한다. 이러한 해석이 옳던 그르던 로의 그리스도인의 완전 개념은 웨슬리의 전 생애에 영향을 미친 성서해석관이요, 구원관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윌리암 로의 저작들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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