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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시,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무는 자리
    교회력에 따른 본문 중심 설교 2011. 2. 16. 23:46

    주현절 후 제6주일[20110213]

     

    가시,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무는 자리
    (고후 12:6-10)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자신에게서 그것이 떠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세 번이나 간구했지만 간구한대로 응답받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을 겸손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또한 바울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면서 약함 가운데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육체의 가시’ 문제를 해결하는 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함께 상고해 보길 원합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가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는 밝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가시’는 ‘막대기, 말뚝’이라는 원래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바울에게 그것은 경미한 결점이 아니라 무언가 큰 고통을 주는 것임은 분명합니다.

     

    바울이 지닌 ‘육체의 가시’는 생명에 치명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안질과 같은 육체적 질병으로써(갈 4:15) 고질적으로 바울의 육신을 괴롭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육체를 괴롭히는 이것이 없어지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세 번이나 주께 간구했다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 1절에 보면 바울은 네 종류의 기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간구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고, 기도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입니다. 도고는 중보기도이고, 감사는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이 간구대로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셨지만 바울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육체의 가시’를 자신에게 머물게 하신 것이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전에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러 다닌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예수의 도를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변하여 도를 전하니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에게 안수하면 성령이 임하고(행 19:6), 바울의 몸에 닿았던 손수건을 병자에게 대기만 해도 병이 낫고 악령이 떠나는 기이한 일들이 일어납니다(행 19:12).

     

    이런 바울이 자신의 ‘육체의 가시’를 위해 간구했지만 하나님은 고쳐주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울이 깨달은 것은 자신에게 나가는 능력으로 인해 스스로를 높이는 일이 없도록 경계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것입니다.

     

    바울에게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육체의 가시’가 있듯이 모든 사람들에게는 자신 안에 ‘가시’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가시’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고통, 상처, 단점들이 모두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가시’로 인해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처럼 ‘가시’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처음 인류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결과 하나님은 여자에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하셨고, 남자에게는 먹기 위해 땀 흘려 일하는 고통을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땅이 아담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창 3:18). 하나님은 땀 흘리는 고통을 주시고 땅의 소산을 먹으라고 하시면서 왜 그 땅에 가시덤불과 엉겅퀴도 나게 하신 것일까요?

     

    가시덤불과 엉겅퀴는 범죄 한 인간에게 주어진 저주의 상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모든 땅이 가시덤불로 덮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경작을 하며 가시덤불을 볼 때 마다 하나님께 범죄 했던 불순종과 교만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시’는 모든 인간의 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가시를 놔두시는 것은 범죄 하기 쉬운 인간의 무지, 실수, 연약함의 모습을 늘 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없애주시기를 간구했지만 하나님은 바울에게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9절입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육체의 가시’가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이루는 은혜의 도구가 된다고 바울은 고백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게 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7절 이하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신다.”고 고백하면서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삼손은 자신의 힘만 믿다가 블레셋의 술책에 넘어가서 치욕을 겪었습니다. 우리 안에 주신 ‘가시’는 나를 믿지 말고 겸손하게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 ‘가시’를 볼 때마다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도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순간 기뻐하면서 자신의 약함을 오히려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9-10)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것은 나에게 무슨 큰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내가 큰 일을 해서도 아닙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할 수 있으며,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용하시면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드러나기 때문에 기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우리의 존재 이유는 나를 통해 그리스도의 능력이 드러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만날 수 있는 식물은 딱 하나 가시나무 종류밖에는 없습니다. 모세가 만난 불이 붙은 떨기나무도 광야에 있는 흔한 가시나무입니다. 광야에 생존하는 가시나무, 그것은 광야 같은 우리 인생에 가시나무 같은 뗄 수 없는 존재가 늘 함께 있다는 것을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사람마다 이 가시가 없어지기를 바라고, 그 가시 때문에 고통 인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가 고통의 가시를 빼려고 하면 할수록 상처가 깊어지고 고통은 심해집니다.

     

    우리가 아파하는 그 상처, 그 고통의 자리를 묵상해보면 그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가시’ 자리가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무는 자리임을 보게 되었습니다. 광야 인생에 가시나무는 모세의 초라한 모습을 상징합니다. 그 가시나무에 불이 붙으니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상처를 진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 내가 할 일은 이 상처들을 값진 것으로 이해하라.”는 안셀름 그륀의 말을 떠올려 봅니다. “내가 상처를 받은 그곳에는 나의 보물도 있습니다. 나에게 상처란 하나님을 경험하는 본질적인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내 안의 ‘가시’를 빼내려 하지 말고, 성령의 불이 붙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내 안의 ‘가시나무’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기를 기도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상처를 진주로 변화시키시며,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시며, 약할 때 강함이 드러나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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