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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
    교회력에 따른 본문 중심 설교 2008. 1. 27. 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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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눅 19:11-27)

     

    지난 주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대해 설교하였는데, 저자 누가의 의도는 이 본문을 앞 선 본문 “과부의 끈질긴 기도”와 연결시키면서, 서로가 대조되는 양극의 균형을 보여주려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누가복음에서 말하고자 하는 “참 인간이 되는 균형 잡힌 길”이라는 주제가 특별히 대조라는 기법으로 쓰여지고 있음을 깨달은 뒤 누가복음을 새로운 각도에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의 본문과 앞 선 본문 “삭개오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대조의 관계 속에서, “열 므나의 비유”가 말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그 동안 “삭개오 이야기”에서 전하는 주제는 삭개오 보다 먼저 찾아오신 하나님의 선행 은혜, 혹은 예수님을 만나 회개하고 구원받은 삭개오 등이라 들어왔습니다.

     

    저는 이번 한 주 동안 누가가 예수님의 “열 므나의 비유”를 통해서 독자들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제 본문을 함께 보면서 (1)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누가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2)므나의 의미와 (3)우리도 므나를 받았다고 한다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열 므나의 비유

    누가복음 19장 1-10절 “삭개오 이야기”에서 전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메시지는 9절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가 과거의 삶을 회개하였을 때, 예수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오늘의 구원” 선포를 들었을 때, 11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곧 입성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곧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하는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조차도 이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 한다고 하니 반신반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궁금해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므나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완전히 잘못 이해하였기 때문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무리들에게 역사적 사건을 빗대어 이야기를 전개하십니다. 14절의 “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과거의 어떤 사건을 기억하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유대 분봉왕 아켈라오는 기원전 4년에 자신의 왕권을 확인받기 위해 로마로 여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켈라오가 자신의 왕권을 인준 받기 위해 로마를 방문했을 때, 50명으로 구성된 유대인 사절단이 로마로 뒤따라가 그가 왕으로 임명되는 것을 반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자신을 왕위를 받고 돌아오려고 먼 나라로 떠나는 왕으로 비유합니다. 그를 미워하는 무리는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하는 유대인 무리들을 비유하는 것입니다. 왕은 떠나기 전 자신의 종 열 명에게 각각 한 므나씩 나누어주며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여기서 종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당시 은화 한 므나를 오늘의 돈의 가치로 환산해 보면 하루 품삯을 10만원으로 계산했을 때 천 만원이라는 수치가 나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므나가 얼마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므나씩 “동일하게” 나누어 주었다는 사실이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제자들에게 동일한 은화를 맡겼다는 것과 어떻게 그것으로 장사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2. 므나의 의미

    “삭개오 이야기”에서 예수님이 강조하시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구원의 현재성입니다. 누가복음에서 누가는 하나님의 나라, 예수, 구원을 거의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열 므나 비유에서는 앞 서 예수님께서 구원이 현재적으로 이루어짐을 말씀하면서,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지연됨으로 구원이 과정적으로도 이루어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종들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한 므나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한 므나는 누가 누구에게 준 것입니까? 본문에서는 한 귀인이 그의 열 종들에게 주었다고 말합니다. 13절에서 중요한 단어는 무엇인 것 같습니까? 이 구절에서 중요한 단어는 “불러”에 해당하는 칼레오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부르시고" 그 부르심에 "나아 온" 사람들에게는 동일하게 한 므나 씩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주시는 장사 밑천과 같은 한 므나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믿고 달라진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겠다고 결단하는 순간 그 전에는 없었지만, 새로 생긴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 믿고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결단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위탁물은 바로 그 사람 안에 있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은 열 종에게 한 므나 씩을 주었는데 뒤에 보면 세 사람만 평가를 받습니다. 이는 자신에게 맡겨진 한 므나를 어떻게 사용하였는가에 대한 세 부류의 사람들을 대변한다고 보여집니다.

     

    첫 번째 사람은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고, 두 번째 사람은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남겼습니다. 두 사람 모두 주인의 칭찬을 받는데,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다스리는 권세를 차지하라”하였고, 또 한 종은 “너에게는 다섯 고을을 맡기겠다”고 하셨습니다.

     

    주인이 그 종들에게 칭찬한 일은 작은 일에 충성한 삶의 과정이었습니다. 여기서 충성하였다로 번역된 헬라어 피스토스는 “믿음이 변치않은”, “신실한”이라는 뜻입니다. 충성은 믿음이 충만할 때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맡겨주신 한 므나는 믿음이고, 예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어려움과 환난이 있더라도 인내로 이 믿음을 지키고, 삶에서 믿음의 열매 맺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을 주신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입니다.

     

    반면 맡겨진 한 므나를 장사하지 않고, 수건으로 싸 둔 사람은 주인에게 꾸중을 듣고 심판을 받았을 뿐 아니라 주어진 한 므나마저 빼앗기게 됩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엄중한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이 누가복음 18:8에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지속적으로 간구하는 과부의 믿음과 같은 그런 믿음을 소유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음을 내포하시는 말씀입니다. “진정한 우정은 고통 중에 있을 때 비로소 입증된다”는 격언처럼, 진정한 믿음도 환난과 시련의 때에 비로소 입증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은 구원얻을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을 성장시키지 않고, 저버린 자는 구원마저 보장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 한 므나를 받은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면 우리도 동일한 한 므나 곧 믿음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구원얻는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다면 그 자체로 목적이 달성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이 믿음의 열매를 맺는 삶의 과제도 부여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 얻는 믿음이 성장하여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믿음의 열매는 곧 주님을 증거하며 살았던 삶, 하나님 나라의 일에 헌신하였던 삶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고, 나와 내가 속한 공동체에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는지에 대해 하나님은 상급으로 은혜 주십니다. 본문은 열 고을, 다섯 고을 다스릴 권세를 주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그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마지막 날 보시는 것은 우리의 삶 자체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7-8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거룩하게 하심이니, 그러므로 이를 저버리는 자는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살전 4:7의 우리말 번역이 좀 불명확한데, NIV는 “God calls us to live a holy life”라고 되어있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의 The Message 에서는 거룩한 삶을 살라는 말을 좀 더 풀어서 번역했습니다. “God has invited us into something holy and beautiful - as beautiful on the inside as the outside.”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불결하고 무질서한 삶이 아닌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입니다. 이러한 삶은 겉과 속이 다를 수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거룩하면 생활도 거룩한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속이 아름다우면 겉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것이 삶의 열매입니다.

     

    거룩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얼굴로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우리의 삶의 모습을 통해 증거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본문은 분명 다가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우리의 삶의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의 본문을 정리하면서, 이 본문 전체가 우리에게 어떤 진리를 던져주고 있는지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속박이 아닙니다. 부모는 갓난 아기가 자라게 되면 걸음마를 연습시키고, 더 자라면 말을 가르치고, 말을 가르치면서 예의를 가르칩니다. 이러한 교육은 부모가 아이를 속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기본적 삶의 양식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건강하게 살아가도록 믿음을 주시고 믿음을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싫다고 믿음을 포기하면 성장이 없는 것입니다. 천국 잔치를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3-4를 보면,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낸다 하였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함이라.”

     

    본문은 부름받은 제자를 종이라 비유했지만 우리는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청지기입니다. 주인의 지시에 수동적으로 일만 하는 자유 없는 종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 돈, 사명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이루어 드리는 청지기입니다. 우리는 세 번째 부류에 속하는 한 므나를 수건에 싸 두었던 종처럼 하나님을 잘못 이해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이 진정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실천해야 합니다.

     

    청지기적 삶이란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겠느냐는 질문에 “예” 한다는 것이 응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고 구원의 은혜를 주심에 감사하고, 그 감사함을 삶 속에서 표현하는 것이 응답입니다. 사도 바울은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말로 이러한 의미를 표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이란 내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가기 위해 매 순간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이 세상에서 책임 있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획일적인 반응과 행동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같은 사건, 같은 은혜, 같은 설교에도 응답은 다 다릅니다. 그것조차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로 맡기신 것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살아있는 믿음은 반드시 응답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에겐 각자 자신이 결단 한 바의 반응이 있습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삶 속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와싱톤한인교회를 담임하시는 김영봉 목사는 넥타이를 매지 않는 분입니다. 단순해 보이는 일 같지만 그것은 그분의 취향에서 택한 행동이 아니라 한 사건에 대한 응답의 결과였습니다. 김영봉 목사는 자신이 넥타이를 매지 않는 이유를 자신의 책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 변화는 몇 해 전 방글라데시의 감리교 신학교에 봉사하러 갔다가 충격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공항 광장과 도로 옆에 줄지어 서 있는 수많은 걸인들의 모습도 충격이었지만, 신학교 주변의 농가를 둘러보면서 더 큰 충격을 받았다. 부엌 하나, 방 하나의 작은 토담집에서 그들은 아주 만족하며 살고 있었다. 대도시 길가에 늘어선 걸인들을 보며 나는 ‘내가 이들의 몫을 훔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했고, 농가 주민들을 보며 ‘이렇게 검소하게 살면서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이후 나는 삶의 규모를 줄이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와 옷장을 열었더니 수십 개의 넥타이가 제일 먼저 눈에 거슬렸다. 주로 학생들이나 교우들이 선물한 것이다. 30개 정도 되는 넥타이들은 보통 5-10만 원에 해당하는 것들이었다. 3만 원이면 방글라데시에서는 4인 가족의 한 달 생활비다. 그렇다면 나는 300가구가 한 달 먹을 수 있는 돈을 넥타이에 묶어두고 있었던 셈이다. 넥타이를 매지 않는다고 문제 될 것은 없다. 그것은 단지 멋을 내기 위한 것이다. 안 해도 상관없는 장식을 위해 그 많은 돈을 사용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이후로 넥타이를 매지 않는다.”

     

    저는 넥타이 매는 것을 정죄하거나 사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김 목사가 경험한 어떤 한 사건이 그에게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게 했고, 거기에 응답하며 사는 한 신앙인의 모습을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순간순간 우리를 결단으로 이끄시는 은혜를 주십니다. 다만 우리가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날마다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우리가 응답하면, 우리의 응답하는 믿음에 하나님은 다시 응답하는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며(롬 12:2),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며 사는 선한 청지기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동산교회 이관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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