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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말씀을 먹어야 산다.
    교회력에 따른 본문 중심 설교 2016. 12. 11. 23:00

    대림절 3주, 성서주일(2016년 12월 11일)

    마태복음 4장 1-4절

    말씀을 먹어야 산다.

     

    가. 성도는 말씀을 먹어야 산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감동으로) 이끌림 받아 광야로 가서 시험을 받았다}(1절).

    본문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마귀의 유혹을 물리친 첫 번째 장면으로, 사람은 영의 양식인 말씀을 먹어야 살 수 있음을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세 가지 시험을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도 우리와 동일한 사람이었음을 말해주고, 우리도 필연 이 유혹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가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끌리다’(αναγω, 부정과거, 수동태)는 성령의 감동으로 이끌림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흔히 성령 체험하면 황홀경이나 천국에 갔다온 것, 안수하면 넘어지는 것, 치유나 기적 등과 연관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본질적인 성령 체험이 아닙니다. 성령은 육적인 욕구를 채우거나 외적인 화려함에 사로잡히게 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인간의 내면을 보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인도합니다.

    오병이어 사건을 경험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다녔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라고 하셨습니다(요6:26). 오병이어라는 ‘표적’(σημειον)은 우리에게 필요한 영의 양식을 가리키기 위해 주신 사건이었습니다. 즉 신앙생활의 본질은 배를 채우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먹고 자라는 데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말씀을 먹어야만 삽니다.

    나. 마귀는 말씀보다 떡이 더 중요하다고 유혹한다.

    {(거기서) 사십일 주야로 금식하시니 몹시 배고프셨다. (그 때에) 마귀가 예수님께 다가와서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떡덩이가 되라고 해보시오”라고 말하였다}(2-3절).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금식하셨습니다. 심신이 극도로 지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때에 마귀가 달려들었습니다. 배부르고 평온한 때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배부르고 평온할 때는 ‘오직 말씀’이라고 외치고, ‘오직 믿음’이라고 확신하면서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혹은 묘하게도 그럴 때 찾아오기 보다는 위기의 상황, 욕심의 기회, 분노의 순간에 불현듯이 다가옵니다. 그래서 대부분 그 때 넘어지고 맙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한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약1:15). 여기서 ‘잉태하다’(συλλαμβανω)는 내가 욕심을 계속 붙들고 있다는 뜻이고, ‘낳다’(αποτελεω)는 그런 생각 속으로 유혹이 계속해서 들어와 죄를 짓게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이러한 예들을 쉽게 부딪치게 됩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다”, “꿩 잡는게 매다”, “내 코가 석 자다” 등등이 그런 핑계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궁지에 몰린 순간을 놓치지 않고 사자 입처럼 달려듭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먹고 사는 것이 우선이라는 마귀의 속임수를 물리칠 수 있는 강한 힘이 있어야 합니다.

    다. 말씀이 체질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사람이 떡만으로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고 있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라고 기록하지 않았느냐?”라고 말씀하시며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셨다}(4절).

    그러면 예수님께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신 이야기를 살펴봄으로 우리도 어떻게 하면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지 생각해봅시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지금은 말씀보다도 떡을 택해야 할 때가 아니냐?”라는 속삭임으로 시험하였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사람이 떡만으로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라고 하지 않았느냐?”라고 응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성구 인용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인용은 하셨지만 그 뉘앙스는 “마귀야, 너도 율법을 잘 알고 있고, 곧잘 써먹기도 하지? 물론 나도 그렇다. 그렇지만 내 안에는 하나님의 그 말씀이 지금도 흐르고 있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용하신 “모든 말씀으로 산다”에서 ‘말씀’(ρημα)은 ‘흐른다’(ρεω)는 뜻에서 왔습니다. 율법을 아는 차원과 말씀이 흐르고 있는 차원은 천지 차이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체질화하심으로 극한 상황에서도 능히 유혹을 물리칠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루아침에 마귀의 모든 유혹을 물리치는 경지에 오른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네 가지 밭의 비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마13장). ‘길 가’나 ‘흙이 얕은 돌밭’의 예는 말씀을 듣고 금방 잊어버리는 경우를 말합니다. 또한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긴 들어도 욕심에 가로막혀 말씀이 체질화되지 못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우리는 ‘좋은 땅’이 되어야 하는데, 곧 말씀을 계속해서 듣고 실천함으로 머리에 머무르는 차원이 아니라 몸속에 흐르는 차원이 되어야 합니다.

    라. 말씀이 체질화된 사람은 참된 생명을 얻는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만으로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고 있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4절).

    예수님은 말씀이 체질화 되신 분이십니다. 사도 요한이 이를 잘 표현하였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독생자의 영광이었다. 그에게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요1:14). 여기서 ‘되었다’(γινομαι)는 예수님 스스로 말씀을 체질화시켰고, 하나님이 그것을 인정하셨다는 뜻입니다.

    듣기만 한다고, 믿기만 한다고 말씀이 체질화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광야금식 사십 일은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생활 사십 년을 연상케 합니다. 모세는 광야 사십 년을 하나님의 연단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사십 년 동안에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너를 시험하시고, 낮추시며, 주리게 하시며 또 만나를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라”(신8:2-3).

    그리고 모세는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다”라고 하였습니다(신8:16). 본문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 삼아 사는(ζαω) 사람은 결국 참된 생명(ζωη)을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말씀이 내 안에 흐르고 체질화되고 있는 사람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어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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