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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완전으로 나아가라.
    성경적 구원의 길 2015. 5. 24. 19:30

    웨슬리 회심기념 연합성회(2015년 5월 24일)

    마태복음 5장 48절

     

    완전으로 나아가라.

     

     

    당진동지방의 웨슬리 회심기념 연합성회에서 말씀을 전할 수 있게 되어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한 달 전쯤에 요청을 받고 긴장된 마음으로 준비를 했습니다. 특별히 감리사님이 웨슬리 신학의 한 주제를 택해서 집중적으로 설교하는 시간이 되기를 부탁하셔서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는 감리교회의 선조인 웨슬리 목사님의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웨슬리 회심기념 연합성회를 통해 감리교인으로서 웨슬리 목사님의 정신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영적 각성의 귀한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Ⅰ. 웨슬리 정신

    웨슬리 목사님은 1738년 5월 24일 저녁 런던의 올더스게잇 모라비안 집회에서 회심 경험을 했습니다. 이후 웨슬리의 사역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저명한 웨슬리 학자의 말에 의하면 “이 사건의 일차적 중요성은 웨슬리의 영적, 신학적 자기 이해에 있어서 중심이 되는 개념 검증 곧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확신에 있었던 것이지 시간과 장소, 행동 등 그 사건 자체는 웨슬리 자신에게도 오래 기억되지 않을 만큼 중요하지 않았다”고 평가했습니다(하이첸레이터).

     

    많은 사람들이 1738년 웨슬리가 회심을 경험한 후 복음전도자로 놀라운 부흥을 일으켰다고 알고 있는데 사실은 이 날의 회심의 의미는 웨슬리에게 있어 칭의의 믿음을 얻는 경험이었습니다(I felt my heart strangely warmed. I felt I did trust in Christ, Christ alone for salvation and an assurance was given me, that He had taken away my sins, even mine and saved me from the law of sin and death). 오히려 부흥운동의 측면은 5월 24일이 아닌 다음 해인 1739년 4월 2일의 야외설교 사건이 더 핵심적이었다고 보기도 합니다(아우틀러).

     

    웨슬리 목사님은 메소디스트 부흥운동을 회고하면서 “이 운동이 자연스럽게 일어났고, 방향성도 스스로 찾아갔다”고 기록했습니다(메소디즘의 약사). 이는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일하셨다는 고백입니다. 웨슬리의 회심일을 기억하는 것도 의미 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웨슬리 스스로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았으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18세기 감리교회 부흥운동은 실로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우리가 웨슬리 목사님을 보며 본받을 것이 참 많은데 무엇보다 일평생 성경 연구를 멈추지 않으며 성경적 기독교를 추구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적인 구원의 길을 선포하며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웨슬리 시대에 잘못된 교리들이 있었는데, 정적주의, 이중예정론, 율법무용론, 열광주의 등이었습니다. 웨슬리는 이러한 잘못된 교리들과 싸웠습니다.

     

    잘못된 교리들은 가만 놔두면 독버섯처럼 퍼져나갑니다. 이는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지 못해서 나온 결과들입니다. 잘못된 교리는 신앙을 병들게 합니다. 교리는 근본 성경의 진의를 잘 이해하는 데서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은 교리는 믿음의 시녀이고, 믿음은 사랑의 시녀라는 말을 잘 새겨야 하겠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잘못된 교리와 이단들로 인해 교회가 신음하는 모습들이 보입니다. 이는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정서가 성경을 진지하게 숙고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잘못 이해하고 십자가의 은혜를 헛되이 받은 결과입니다. 성경이 무엇이 말하는지 고민하지 않고 내가 속한 교단의 교리이기 때문에 무조건 맹신하는 일들도 있습니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위험성을 경계하면서 지속적인 은혜의 수단을 통한 믿음의 성장을 강조하였습니다. 은혜에 응답하는 신자에게는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칭의의 믿음이 있으면 반드시 성화의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웨슬리는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성령의 열매가 없고, 선행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실제는 믿지 않는 것이라고 일갈했습니다. 믿는 사람은 은혜 안에서 성장하고 완전으로 나아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Ⅱ. 완전의 의미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의 완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성경이 ‘완전하라’고 했기 때문에 완전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성경이 우리 보고 하라고 명한 것은 마땅히 해야하는 것이며 또한 능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보고 불가능한 것을 하라고 시키지 않았습니다(신30:11).

     

    ‘너희도 완전하라’고 했는데, 여기서 ‘완전한’(텔레이오이)은 ‘텔로스’에서 왔습니다. ‘텔로스’는 ‘목표, 끝’이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완전하라’고 하신 의도는 완전을 신앙의 목표로 두고 달려가라고 하신 데에 있습니다.

     

    완전의 목표는 누구는 하고, 누구는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너희도’ 완전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완전의 목표에 너희도 도달할 수 있으니 포기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성경은 노아를 ‘완전한 자’라고 했습니다(창6:9). 욥도 ‘완전하였다’고 했습니다(욥1:1). 이들은 하나님이 보실 때 완전했다고 인정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완전의 목표는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이 아닙니다. 바울도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라”고 설교했습니다(엡4:15). 성도는 완전의 목표를 포기하지 말고 인내하며 결승점까지 달려가야 합니다(히12:1).

     

    그러면 ‘완전’이 무엇인지, 완전의 의미를 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 앞에는 여섯 개의 반제로 된 설교가 있습니다. 분노에 관해, 간음, 이혼, 맹세, 보복, 원수 사랑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모두 ‘너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한다’는 형식입니다.

     

    여기서 ‘너희들이 생각하는 바’란 모세의 율법이나 랍비들의 가르침 등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우고 알고 있었던 기준을 말합니다. 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는 이렇게 말한다’는 하늘 아버지의 뜻 곧 하나님의 기준을 말합니다. 본문에서 ‘그러므로’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가치관을 전제로 하며 하나님의 기준에서의 완전을 이루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는 하나님의 기준인 완전에 있습니다. 내 기준의 완전으로 재조정해서는 안됩니다. 사사시대는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삿21:25). 이것이 내 기준으로 정한 신앙생활입니다. 이렇게 되면 내 울타리 안에 하나님을 가두게 되는 결과를 만듭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내가 원하는 대로 일하셔야만 좋은 하나님이 됩니다. 이는 참 위험한 신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Ⅲ. 완전으로 나아가는 방법

    1. 모든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에는 큰 계명과 작은 계명이 구분되어 있지 않습니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계명이 따로 있고 소홀히 해도 되는 계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마5:19).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잘 지키는 것이 완전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는 이것이 서기관과 바리새인 보다 더 나은 의라고 하였습니다(마5:20).

     

    레위기 말씀에 “너희는 내 계명을 지키며 행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라고 하였습니다(레22:31).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명을 ‘지키라’고 주셨습니다. 계명은 ‘믿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큰 계명이든 작은 계명이든 지켜 행해야 합니다.

     

    야고보서에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고 하였습니다(약2:10). 지키지 않아도 되는 율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보란듯이 계명을 어기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는 것과 다름없다”고 하였습니다(산상설교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믿지 않는 것입니다(요일2:4).

     

    마태복음 19장에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영생을 얻는 방법을 물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이 청년은 자신이 모든 계명을 지켰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시며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켜야 한다는 것은 알면서도 어떠한 하나의 계명은 나에게 해당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하기 싫은 그 한 가지를 지키는 것이 완전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 힘으로 모든 계명을 지키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계시다”에서 ‘계시다’는 능동태로 쓰였습니다. 즉 하나님은 스스로 완전히 계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완전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너희도 완전하게 있어라”에서 ‘있어라’는 중간태로 쓰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완전해지는 대상은 나 자신이지만 완전하게 하시는 주체는 하나님이심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수동으로 있으면 결코 완전해질 수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성숙해지도록 노력해야 완전해질 수 있습니다(딤전4:15).

     

    2.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완전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은 창세기의 에녹 이야기를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창세기 5장을 보면 아담의 7대손인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이었음을 증거하였습니다.

     

    ‘에녹’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께 바쳐졌다’는 뜻입니다. 에녹이라는 이름 속에서 그는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경외하면서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는데 그 이름은 ‘창 던지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전쟁을 하게 되면 창을 가장 잘 던지는 사람이 공격해 오는 적군을 향해 창을 던져 물리쳤습니다. 그래서 창을 던지는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곧 군대 전체가 패망한다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이 싸울 때 다윗이 ‘창 던지는 자’ 골리앗을 물리치자 블레셋 군대가 도망친 것을 볼 수 있습니다(삼상17:51).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자마자’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22절). 즉 이 말씀은 에녹이 득남한 사건 속에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었음을 암시합니다. 에녹은 므두셀라를 통해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는 뜻을 항상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에녹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며 경건하게 살았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유14-15).

     

    원문을 보면 에녹의 신앙생활이 어떠했는지 살펴볼 수 있는데, 창세기 5장 22절과 24절은 ‘동행하였다’는 동사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21절에 ‘낳았고’는 22절의 ‘동행하며’와 연결됩니다. 마찬가지로 23절에 ‘살았다’는 24절에 ‘동행하였다’와 연결됩니다. 둘 다 미완료동사로 자녀를 낳은 일과 하나님과의 동행이 분리된 행동이 아니라 자녀를 낳으면서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하루하루 살면서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이런 모습을 일상에서의 동행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예배드릴 때만 하나님을 부르면서 동행한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시고 일하면서 한결같이 순종하며 살았다는 뜻입니다.

     

    동행의 조건은 순종입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임합니다. 에녹이 살던 시대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고 방탕하게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에녹은 하나님의 신탁을 선포하는 예언자의 사명을 감당하며 끝까지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습니다. 구별된 삶을 살았더니 하나님이 에녹을 크게 구별하셨습니다. 완전의 목표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일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것이 곧 완전으로 나아가는 모습입니다.

     

    3.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자기를 부인해야 완전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24절). 완전으로 나아가는 일에 자기를 부인하는 일은 필수입니다. 모든 계명을 지키는 일과 일상에서의 동행과 마찬가지로 나를 부인하는 일에도 결단과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선 ‘부인하다’(아파르네오마이)는 말의 뜻을 살펴보면 ‘완전히 관계를 끊어버리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자기 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모든 것들에서 의도적으로 떠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인하다’는 동사는 부정과거 명령법으로 쓰였음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고 하는 일은 분명한 결단이 있어야 하고, 주님을 따른다는 결단이 이미 과거가 되게 하라는 명령입니다.

     

    누가복음 5장에 예수님이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부인은 내 생각, 내 경험, 내 의지를 내려놓고 주님의 뜻에 순복하는 것입니다.

     

    웨슬리 목사님의 회심을 1738년 뿐 아니라 1725년으로 보기도 하는데 웨슬리는 23세에 제레미 테일러, 토마스 아 켐피스, 윌리암 로우 등의 책을 읽고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 곧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드리기로 결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 자기를 부인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래서 웨슬리 목사님은 일평생을 말씀에 순종하며 완전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Ⅳ. 성령 충만과 완전

    지금까지 우리는 완전으로 나아가라는 주님의 명령을 이루기 위한 방법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성도는 모든 계명을 지키고, 순간순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기를 부인하며 완전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물론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깨어 기도하며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에스겔 47장을 보면, 성전 동쪽으로 물이 흘러나오는데, 오백 미터 나가니 발목까지 찼고, 또 오백 미터 나가니 무릎까지, 다시 오백 미터 나가니 허리까지 차오르다가 마지막으로 오백 미터 나가니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성령이 충만하게 되면 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지배를 받게 된다는 환상을 에스겔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바울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하였습니다(엡5:18). 성령 충만 없이는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완전으로 나아간다고 하지만 연약함, 무지, 실수, 유혹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성령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필요합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우리의 구원을 일컬어 “구원은 우리 영혼에 처음 밝아오는 은혜의 여명으로부터 영광스러운 완전에 이르기까지의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라고 하였습니다(성경적 구원의 길).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곧바로 가나안에 들어간 것이 아니듯이 신앙의 여정에는 어려움과 고난이 많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 앞에도 애굽의 미련과 가나안의 유혹은 언제든지 나타날 수 있는 시험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완전을 향해 끝까지 바른 길로 걷는다면 반드시 영광스러운 완전에 이르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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