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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혼의 거듭남
    교회력에 따른 본문 중심 설교 2009. 7. 30. 20:53

    성령강림 후 제8주[20090726]

     

    영혼의 거듭남(요 3:1-21)

     

    구원이란 기독교의 진리에 대해 감정적으로 동의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기독교의 진리에 대한 우리의 지적 이해나 동의로써 구원이 얻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분명 지성을 추구하지만 구원은 지성적, 감성적으로 해결될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은 영혼의 변화 또는 마음의 변화를 말합니다. 이는 내 뜻과 의지로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엡 2:8) 그리고 구원을 얻는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로서 처음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면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쉽게 구원이란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말도 분명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유아적 표현이고, 우리가 지성적 사고를 할 수 있다면, 좀 더 성숙한 대답으로 구원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구원이란 한 마디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해 가는 과정”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 할 수 있는데, 칭의와 성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칭의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신분의 변화로(요 1:12),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for us)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위대한 행하심입니다. 성화란 우리 안의 죄성이 죽어지고, 이와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이 증가하는 과정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in us)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다시 새롭게 하시는 위대한 행하심입니다.

     

    구원은 칭의와 성화 둘 다를 포함하는데 중요한 것은 칭의와 성화를 연결하는 연결고리와도 같은 것이 중생 곧 거듭남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서 예수님은 유대인의 지도자요 바리새인이었던 니고데모에게 세 번이나 거듭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장 3절에,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5절에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그리고 7절에 “너는 거듭나야만 한다(You must be born again).”

     

    우리는 그 동안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말씀을 너무나 단절적이고 개별적으로 외워왔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3장 16절이 니고데모와의 대화 속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유념해야 하겠습니다. 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네가 반드시 거듭나야 하겠다고 말씀하시면서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을 하셨을까를 이 시간 한 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3장 2절을 다시 보면,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찾아온 때가 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9장 5절에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다.” 밤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니고데모의 영적 상태와도 같습니다. 어둠이 빛에게 그럴듯한 말로 접근하고 있는 것입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앞 선 본문 요한복음 2장 23절에서 유월절,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사역하시며 표적도 나타났는데, 많은 사람들은 나타난 표적을 보고 예수 이름을 믿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신이 행하는 표적을 보니 당신은 랍비요, 선생이요,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 맞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능구렁이같고, 본질을 꿰뚫지 못하고, 껍데기만 보고 찾아 온 니고데모에게 거두절미하고 한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는니라.” “진실로, 진실로”라는 말은 내 말만 진짜라는 것입니다. “내가 곧 하나님이다. 내 말만 믿어라.”는 뜻입니다. 니고데모는 도대체 이해할 수도 없고,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이상한 말입니다. 다시 태어나라니요!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고, 유대인의 지도자였습니다. 성전 중심의 삶을 살며, 613개의 계명을 철두철미하게 지키고, 자신들은 야곱의 자손들로 영생을 얻을 것을 확신하였던 그 바리새인인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율법적 신앙, 성전 중심의 삶이 아닌 거듭난 신앙, 온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중심의 삶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어버린 유대인들의 타락을 보시고 “이 성전을 헐어버려라”(요 2:19)고 노하셨습니다. 장사꾼의 소굴이 되어 버리고, 형식적 종교로 전락해버린 너희들의 성전 중심의 삶을 무너뜨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장 13절에서, 야곱의 자손이라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아!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바리새인들아! 너희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착각하지 말라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이렇듯 예수님은 니고데모 속에 틀어박힌 교만과 거짓, 위선의 속성을 까부시며, 하나님은 너희 조상 야곱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시는 온 백성의 하나님 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생은 나 곧 예수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음을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영적인 눈이 열리는 것이 거듭남이고, 아직도 자신의 의를 의지하고 사는 니고데모에게 너는 반드시 거듭나야 된다는 것을 설명하시면서 요한복음 3장 16절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는 수가라는 마을에 사는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과의 대화가 나옵니다. 이 미꾸라지 같은 이방 여인을 통해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그의 말씀을 들은 자들은 그가 유대인들만의 구주가 아니라 참으로 세상의 구주이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요 4:42)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 후 6절에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6절의 영이라는 말, 프뉴마는 8절의 바람과 같은 말입니다. 바람이 임의로 부는 사실을 우리는 의심의 여지없이 확신하지만 다만 바람이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는지는 인간으로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혼 속에 일하시는 성령님의 일하심은 인간으로서는 설명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9절에서 니고데모가 질문한 질문의 대답이 됩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온전히 나 자신을 주님께 내어드리고, 하나님만이 우리를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혼동 속에서 어떠한 결단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9절의 질문 이후 갑자기 본문에서 니고데모가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까? 계속해서 예수님의 말씀만 이어지고 있습니다. 12절,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라는 말씀을 니고데모에게 주신 예수님의 의도는 니고데모에게 빨리 진리를 알라는 것이 아니라 네가 이 문제를 가지고 평생 씨름해 보아라는 뜻입니다.

     

    니고데모는 더 이상의 물어볼 말을 잃은 채 예수님의 입만 주목하고 있을 것 같은 장면이 상상 됩니다. 3절부터 예수님이 니고데모를 까부시다가 14, 15절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친숙한 인물인 모세를 언급하며 은근슬쩍 언약적 자비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의 사랑인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마지막으로 18절에서 예수님은 심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심판을 받는 이유는 어떤 흉악한 죄를 저질러서가 아니라, 빛이 왔는데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 자기 고집과 자기 성격대로 살았던 것 그것이 심판의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빛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네 마음에 악을 더 사랑하는 마음, 어둠을 더 사랑하는 마음이 네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자기의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처음부터 정곡을 찌르는 말로 쏘아붙이십니다. 니고데모는 육적인 질문으로 반격하지만 어느샌가 니고데모의 소리는 자취를 감추고 맙니다. 그 후 니고데모는 주님을 영영 떠났을까요? 아니면 주님의 제자가 되었을까요?

     

    요한복음 19장 39절을 보면 다시 니고데모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하는 니고데모를 요한복음 끝에서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후 제자들은 다 도망갔지만 19장 38절의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만 찾아왔습니다. 3년 동안 가르친 제자들은 온데간데 없었지만, 위선과 교만으로 가득찼던 니고데모는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제자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분명 밤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밤도 있었지만, 그는 빛에 대한 고민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요 19장에서 주님의 죽으심의 증인으로 서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니고데모였지만 니고데모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의 전부를 본 것이 아니라 진리의 최소치를 본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시편 73편 속에서, 악당들은 왜 저렇게 잘 되고, 나는 왜 초라하고 죽을 고비를 맛보아야만 하는 것일까라고 시인은 탄식합니다. 그러나 갑자기 17절에서 내가 “성소(나만의 구별된 기도 처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깨달았나이다.”라고 시인은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이러한 깨달음의 순간이 얼마나 자주 있었습니까? 이전에 하나님 앞에 행하던 기도, 이전에 하나님 앞에 행하는 신앙생활이 얼마나 엉터리였다는 것을 깨달은 적이 있었습니까?

     

    오늘날 니고데모같은 바리새인은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가요? 우리 속에 밤이 없고 정말 빛을 행하고 있습니까? 우리 안에 거짓과 종교적 위선, 아직도 주님 앞에서 감추고 있는 죄성들은 없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이 시간 우리 안의 모든 어두움, 우리 안의 더러운 죄성들을 주님께 고백하고 이제는 주님만을 온전히 따르겠다는 결심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성경은 진리를 따르는 자가 복된 자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의 길에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있겠다고 우리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 영혼의 참된 거듭남이 일어나 우리 안의 하나님의 형상이 날마다 새로워지고(고후 5:17),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날마다 충만케 되기를(엡 3:17)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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